#본문: 마가복음 9장 17-24절
#기독교강요 제 3권 (상) 2장: 
                 -믿음: 그 정의와 속속에 대한 설명


지금까지 배운 것에 대해서 복습하겠습니다.
기독교 강요 1권은 ‘계시’로 시작합니다.
기독교 강요 2권에서 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가르치죠.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계시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나요? 인간의 고질적이고, 반복적인 죄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율법과 언약을 인간은 늘, 언제나 파기하고,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내려보내주셨어요.
-그 구원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는 중보자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가교(bridge)시죠.
-그래서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완전한 신이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서 화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이죠.
기독교 강요 3장에서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말씀은 인간이 믿음으로 결합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칼뱅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결합할 때,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어떻게 우리가 믿음으로 말씀에 결합할 수 있느냐? 그것은 성령님께서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강요 3권은 성령에 대한 책이면서 동시에 믿음에 대한 책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3권 2장을 살펴볼 텐데요, 굉장히 긴 장입니다.
칼뱅은 이 장에서 믿음의 본질과 정의에 대해서 살피는데요, 
특히 중요한 부분이 신앙의 확신(assurance of faith)에 대해서 다루는데, 다른 말로 구원의 확신(assurance of salvation)에 대해서 다룬다고 해도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을까요? 구원의 확신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이 있습니다.
1) 구원파: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처음 회개할 때,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용서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았으니 구원은 따놓은 당상입니다. 
          때문에 중생하고 난 뒤 회개하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말하죠. 
2) 가톨릭: 신자는 구원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죽어봐야 알지, 살아서 감히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어느 쪽이 맞을까요? 둘 다 아니라면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1. 우리는 먼저 믿음의 본질 속에 들어 있는, 불확실성에 대해서 살펴봐야겠습니다.

[히11: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바라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마음 자세라고 말합니다.
보지 않은 것, 혹은 보시 못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요20:29]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하셨어요. 
사실 눈에 보인다면 믿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아는 것이지요. 
보이지 않으니까 믿는 겁니다. 
[롬8:24]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소명은 아브라함이 평생 남의 딸에 살면서, 자기 땅이 한 평도 없는데 그게 다 자기 땅이라고 믿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눈으로는 자기 땅이 보이지 않는데, 그것을 자기 땅이라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에요.
이처럼 믿음이란 아직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여기에 믿음의 불확실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믿음에는 엄연히 불확실성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정할 수 없어요.  
만일 불확실성이 없고 확실성만 있다면 믿음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바울은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불확실성이 너무 커서 아예 믿음을 포기해 버립니다.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부활은 거짓말이라고 치부해 버립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믿음에서 불확실성을 추방해 버리려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존재를 목격한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부활하신 것이 명백하게 입증가능한 것처럼 주장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승리이지, 건전한 믿음은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런 식의 정신승리는 망상과 공상에 빠져서 거짓 진리를 붙잡게 됩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불확실성에 압도되는 것이 아니지만 반대로 불확실성을 추방해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껴안습니다. 

이때 여기서 불확실성이란 의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지각이 아무리 크다 한들 하나님의 무궁한 세계를 다 헤아릴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겸손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땅에 살면서 부분적으로 보고, 부분적으로 압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듯 우리는 구리 거울로 보듯이 희미하게만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불확실성이 나와요. 
물론 우리는 성경의 묵상을 통해서 어느 정도 희미한 상을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매일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더 깊이 알고, 우리의 믿음이 더 또렷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를 알 듯, 우리도 하나님을 알게 될 그 때까지 우리의 믿음과 지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이러한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입니다. 

2. 불확실성 때문에 우리는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1) 교회 안에는 거짓 믿음을 가진 위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데 교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밭의 비유에 나오는 두 부류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돌짝 밭 사람들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오면 무너지는 그룹입니다. 
가시밭 사람들도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심지어 고난도 어느 정도 견딥니다.  
하지만 돈의 유혹과 세상 쾌락에 휩쓸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부류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마법사 시몬이 나옵니다. 
그는 빌립 집사의 기적과 능력을 보고 놀라서 복음을 믿고, 침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가 베드로가 안수기도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을 받게 하자 에게 돈을 주면서 “저도 손을 얹으면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청탁을 넣습니다. 
이 순간 마법사 시몬은 참 신앙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 감화를 받고, 빌립의 설교를 듣고 은혜도 받고, 침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구원 받은 신자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2) 한편, 오늘 본문을 보면 귀신들린 아이를 데려다 주었는데, 제자들이 끙끙대며 고치지 못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주님은 그들을 보시고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제자들보고 믿음이 없다고 하네요. 그런데 진짜 믿음이 없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제자들은 생명이 없는 자들인가요?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고난이 닥쳐오자 도망쳐 버렸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처음에는 믿고 기뻐하다가 고난이 오니까 믿음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밭의 비유대로 본다면 베드로는 돌짝밭 신자네요. 
그러나 베드로는 결국 순교한 위대한 사도가 됩니다. 
다른 사도들도 한때 믿음이 없었으나 생명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잠시 넘어졌지만 아주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럴 경우, 이렇게 제자들처럼, 베드로처럼 이런 신자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연약하지만 생명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초보 신자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믿음이 매우 약합니다. 하지만 생명이 없지는 않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부류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생명이 없는데, 생명이 있는 척 쇼를 하는 신자고,  
어떤 신자는 연약하지만 생명이 있는 신자라고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주인공은 어떤가요? 
그는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잘 고치신다는 얘기를 듣고 아이를 데리고 찾아와 자비를 구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할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22) 
예수님은 그를 향해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23) 
이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믿음이 있는걸까요? 없는걸까요? 
믿음이 없다고도 할 수 없고, 믿음이 있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상태군요.
과연 그는 위선자일까요? 아니면 믿음이 약한 신자일까요? 

우리는 어떤가요? 
여러분은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은혜도 받지만 생명이 없는 위선자입니까? 
아니면 믿음이 연약하기는 하지만 생명이 있는 신자입니까? 

3. 성경은 우리에게 신앙의 확신, 혹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1) 우선 우리는 그릇된 구원의 확신이 인간을 오만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ex) 영화 <밀양>에 나오는 살인범을 보면 구원의 확신으로 충만하죠. 
하지만 그의 구원의 확신은 그릇된 구원의 확신입니다. 이런 확신은 사람을 오만하게 하죠. 
그러나 반대로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해봅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어떠한 확신도 할 수가 없다고 말이죠. 
우리는 늘 불안 속에 살게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불안 상태 속에 사는 것을 건전한 신앙 상태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확실한 믿음'을 가지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 위에서 신앙을 확신하라고 요구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불안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도덕적이 되게 한다고 주장하지요. 
그러나 불안이 도덕적이 되게 한다면, 그래서 불안 때문에 선행을 하고, 그 선행으로 구원에 조금씩 다가간다고 하면, 
결국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얘기가 되고 맙니다. 
이것은 펠라기우스의 행위구원론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오늘 본분에서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에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23) 

아이의 아버지는 불확실성과 불안함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신앙과 불신앙 속에서 헤매는 모습을 겸손이라고 말씀하시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우리는 불신앙의 태도를 버리고 신앙을 선택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도,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결단할 수 있고, 가져야 합니다.  
관건은 위선자의 오만한 자기 착각이 아니라, 참된 구원의 확신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2) 그렇다면 참된 구원의 확신의 조건은 뭘까요? 
우선 그 첫째는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ex) 전에 박XX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죠, 

“정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 

어떤 기독교인은 기독교 신앙도 이런 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면 기도한대로 현실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노먼 빈센트 필, 로버트 슐러, 조XX, 조엘 오스틴, 론다 번... 이런 사람들이 이런 교설을 퍼뜨렸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최면이나 적극적 사고방식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식의 자기 최면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마치 집이 콘크리트 기초 위에 든든히 서듯이 기독교 신앙도 말씀의 기초 위에 섭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말씀을 믿음으로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말씀도 없는데 그냥 신앙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믿음은 성경 말씀이나 설교 말씀에 ‘아멘’할 때 생겨납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의 기초적인 형태는 지식입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믿음도 불가능합니다. 

지식은 또렷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또한 질문과 의심을 통과해서 자신의 지식으로 되어야 합니다.
덮어놓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과거 가톨릭교회는 이런 식으로 가르쳤어요.
그들은 교회가 정한 것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믿음은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교회의' 믿음이거든요.
개인은 믿을 필요가 없어요. 이미 교회의 믿음이 존재합니다. 그 교회의 믿음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지식이나 인식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들은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맞다고 하면 그냥 무조건 아멘합니다.
그런데 개신교회에서도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목사님들이 꽤 많아요.
목사가 말했으니 무조건 믿어야 한다구요.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말씀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그 말씀에 대한 전인격적 수납이 기초입니다.
즉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에는 '우리가 죄를 지었지만 용서해주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에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아멘'하고 믿음으로 결합하는 것, 이것이 바른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3) 기독교 신앙은 지식이라는 기초 위에 서지만 신앙은 지식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 지식이 아니며, 말씀에 대한 이해나 동의가 아닙니다. 
그런 요소가 들어있지만 그것을 넘어섭니다. 
칼뱅은 말하기를 기독교 신앙은 '이해'를 초월하는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앙은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서 확신의 차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ex) 전 문화부 장관 이어령 박사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었는데, 목사님과 싸우기 위해서 읽었다고 하지요. 
그는 지독한 무신론자였는데 무신론자들이 따라다니던 무신론자였다고 하죠. 
오랫동안 무신론자로 살았던 그가 78세가 넘어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믿고 난 뒤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자신이 평생 갈고 닦았던 문학이론과 텍스트 비평 방식으로 읽고, 해석하는 일을 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지성을 딛고 영성으로 올라갔노라고 자신의 간증집,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우리의 확신은 지성의 차원을 넘어서서 영성의 차원으로까지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지식을 넘어서 확신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에서 믿음이 출발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확신해야 합니다. 

4) 그렇다면 어떻게 지성에서 영성의 차원으로, 지식에서 확신으로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나요?
기독교 신앙의 특정 지점에는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23) 

아이의 아버지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과 불신앙 사이에서 주춤거리며, 우물쭈물, 우왕좌왕하고 있는 이를 향해 도전하고 계십니다.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 양단간에 선택하라! 
이 순간 그 아이의 아버지는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24) 

이 사람은 믿음이 있는 걸까요? 없는 걸까요? 
믿습니다고 했으니 믿음이 있는 것이겠죠.
그런데 믿음 없는 나라고 했으니 믿음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25절을 보면, 예수님이 그의 아들을 고쳐주시죠. 아마도 이 사람은 이 순간 겨자씨만한 믿음이 생겼던 것이 분명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그는 믿음이 없었는데, 바로 이 순간 믿음이 있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너무도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믿음이 있기로 결단했습니다. 

지식은 철저한 논리적 일관성을 따릅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는 지식의 차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의 차원을 넘어선 초월적인 차원, 확신의 차원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편에서 부단한 선택과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아버지가 보여주듯이 그는 그냥 믿겠다고 결단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 없는 모습도 다 같이 고백합니다.
그 선택과 결단에는 자신의 부족함, 믿음 없음, 연약함, 죄악까지 모조리 인정하는 정직하고 진실한 고백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결단은 자신에게 있는 근사하고, 멋진, 잘 가꾸어진 신앙의 모습을 현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장점과 단점,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을 다 완전히 하나님께 내 던지는 것입니다. 
그 투신이 결단이고, 이 결단과 함께 확신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성령님께서 나의 투신에 기름부어주십니다. 
내 편에서는 결단이 있어야 하지만 나의 결단만으로 신앙이 생겨나는 건 아닙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성령님께서 만져주셔야 믿음에 이릅니다.
즉 내 편에서 투신이 있고, 하나님 편에서는 성령님을 통해서 믿음으로 인도해 주시는 겁니다. 

5) 마지막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구원파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을 무기로 담대하게 죄를 짓습니다.  
중세 십자군은 교황이 발행해준 대사, 즉 면벌부를 의지해서 담대하게 사람을 죽였지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테러를 기꺼이 자행할 수 있는 것도 구원의 확신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확신은 인간을 오만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확신은 이런 것이 아니에요. 성경적 구원의 확신은, 우리를 오만하게 하지 않습니다.  

중세의 영성가 성 버나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읽기 쉽게 편집해서 요약함)

‘내 영혼 안에는 두 가지 반대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나 자신을 보자면 나는 죄와 악으로 얼룩진 형편없는 모습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나는 결국 무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인간은 헛것이며, 연기 같은 존재일 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우리를 지극히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보물로 삼아 당신의 품 속에 간직하십니다.  
하나님은 열방을 없는 것같이 보시는 분이시지만 보잘 것 없는 나를 향해서는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까지도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당신께서는 없는 것을 부르시기 때문에 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은 나를 부르시기 때문에 나는 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므로 나는 있습니다.  
내가 있는 것은 나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나를 부르시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내 안에 없습니다.  
오직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하나님 그 분 안에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확신하면서도 오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안에 근거하기 때문에 담대히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 안에는 아무런 선한 모습도 없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보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께 달려가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붙잡음으로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듦으로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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