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목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은 이 영화의 모티브가 ‘에피게니아’에 대한 오래된 그리스의 비극에서 가져왔음을 암시한다. 에피게니아는 영화 속 킴이 에세이를 쓰고 발표를 해서 A+를 받은 과제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여러 판본이 있는데, 그 대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케네 왕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여신의 숲에서 그녀의 사슴을 활로 쏘아 죽인 실수에서 이 비극이 시작한다. 여신은 자신의 사슴을 죽인 대가를 아가멤논에게 요구한다. 얼마 후, 아가멤논의 동생이자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가 아내인 헬레나 왕비를 트로이의 왕자 팔리스에게 빼앗긴 것에 분노하여 그 대가를 치루게 해달라고 형에게 요청한다. 아가멤논은 동생의 청을 받고 거대한 그리스 연합군을 꾸려서 트로이로 출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아르테미스 여신은 연합군 내에 역병이 창궐하게 하고 바다에 역풍이 불게 해서 트로이 출정을 막았다. 그리스 연합군이 출정하기 위해서는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가멤논은 자신의 큰 딸 에피게니아의 목숨을 바쳐야 했다. 에피게니아의 목숨을 대가로 바친 후 비로소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트로이로 출정하여 10년의 긴 전쟁 끝에 승전하고 돌아온다. 하지만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녀는 남편이 딸을 죽인 죄의 대가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클리템네스트라는 그녀의 딸 엘렉트라에 의해서 다시 죽임을 당한다. 엘렉트라는 엄마가 아빠를 죽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 오래된 그리스 비극은 끝도 없이 반복되는 피의 복수에 의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피의 복수는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 에토스가 자리하고 있다. 이 영화의 낯설음은 이러한 원시적 에토스가 현대적 상황 속에 불쑥 그 모습을 드러낸 데서 온다. 그러나 사실 원시적으로 보이는 피의 복수는 우주가 카오스(혼돈)가 아니라 코스모스(질서)이어야 한다는 세계관적 실천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고, 우주적 공리다. 만일 정의가 없다면 우주는 카오스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전쟁은 버틸 수 있어도 카오스는 견딜 수 없다.
정의의 원칙은 단순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곧 '대가'다. 마틴이 스티븐의 팔을 물었다. 스티븐의 고통을 해결할 방법이 무엇일까? 사과(apologize)? 만져줌? 아니다. 똑같이 마틴의 팔을 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비유고, 상징이다. (이것은 이 영화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진리다. 이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비유고, 상징이다.) 그러나 그 비유를 관통하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정의는 '균형을 되찾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사슴(sacred deer)이 죽었다면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아가멤논의 사슴 같은 존재인 에피게니아가 죽어야 한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이 균형의 회복이다.
이 영화는 스티븐의 심장 수술 장면으로 시작한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수술복과 수술 장갑은 스티븐의 수술 실패를 암시한다. 실제로 스티븐의 실수로 마틴의 아버지가 죽었다. 심장전문의 스티븐이 수술에 실패한 것은 그가 수술 전에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의료사고였다. 그렇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스티븐의 대가 지불을 통해서 균형이 바로 잡힘으로써 끝난다. 스티븐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바로 아들 밥을 죽이는 것이다.
대가의 지불이라는 모티브는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온다. 애나는 남편 스티븐의 수술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스티븐의 동료 매튜에게서 듣고 싶어한다. 그러자 매튜는 애나에게 정보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다. 스티븐이 방수 200미터 짜리 시계를 마틴에서 선물한 것도 일종의 대가의 지불이다. 마틴은 스티븐에게 선물을 받은 뒤, 자신도 선물을 준비한다.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틴이 스티븐의 가족 식사에 초대를 받았으니 그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가족 식사 자리에 마틴을 초대한다.
스티븐과 애나는 자녀들에게 상냥하기만 한 부모가 아니다. 종종 두 사람은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로 변신해서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데, 이 역시 부모가 대가를 요구하는 존재로서, 심판자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밥이 머리를 깍지 않는 불순종 행위에 대해서 스티븐이 대가를 요구하고, 킴이 엄마에게 욕한 행위에 대해서 애나는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그러한 대가 요구 행위가 지나치게 원시적으로 나타나서 충격을 주는 것이지 프로이트의 말대로 사실은 모든 부모는 응징의 집행자로서 자녀에게는 신적 존재다.
이 영화에서 관객을 당황시키는 지점은 마틴의 불가해한 능력이다. 처음 펍에 나타난 마틴은 덜 떨어진 지적 장애인처럼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마틴은 마치 샤만 같은 주술적 존재가 된다. 그가 정의를 부르짖을 때, 그에게서 박찬욱의 영화 <올드 보이>의 신학적이고 철학적 담론을 쏟아내는 이우진이 어른거린다. 대체 그는 누구이며, 왜 그에게는 이런 초능력이 존재하는 것일까?
감독이 마틴을 장애인처럼 묘사한 것은 탁월한 전략이었다. 영화 초반 1/3 정도 관객의 호기심을 끌어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마틴의 불가해한 정체였으며, 특히 그가 지적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관객의 궁금증은 극대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애인 설정은 극 초반의 강력한 텐션의 부여할 뿐만 아니라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미셀 푸코와 같은 이들이 잘 지적했듯이, 고대인들에게 광인이나 장애인은 종종 신과 접촉할 수 있는 영매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마틴은 신이 없는 현대 세계에서 마치 신적인 존재처럼 활개치며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마틴의 장애인 설정이 그의 광적이고, 신적인 존재로 변모해 갈 때, 관객에게 가해진 충격은 배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틴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복수에 관한 고대인들의 관습, 곧 에토스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고대인들은 친족이 살해를 당하면 자연스럽게 그 가족에게 복수의 권리가 생긴다고 믿었다. 복수는 권리이면서, 동시에 의무다. 이것은 현대 형법 제도가 정착하면서 사적 복수의 권한을 국가에게 귀속시키기 전까지는 늘 그러했다. 영화에서는 현대적 의미의 형법 제도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스티븐의 의료 과실에 대해서 그는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오로지 마틴의 사적 복수의 권한만 보인다. 현대 형법 제도 이전에 있었던 고대적인 복수의 에토스가 마틴에게서 체현되었다. 고로 마틴의 주술적 권능은 고대 세계에서 누구나 알고 있었던 피의 복수자에게 주어지는 마땅한 권능이다.
마틴이 요구하는 것은 피의 복수다!
“제 가족을 죽였으니 선생님의 가족을 죽여야 균형이 맞겠죠?”
피의 복수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은 늘 따라다닌다. 마틴이 스토커처럼 스티븐을 따라다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마틴이 따라다니기 전에 먼저 스티븐의 양심이 그를 뒤쫓는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레26:17] 스티븐은 이미 2년이나 지난 사건이지만 여전히 쫓기고 있었다. 마틴은 스티븐에게 밥의 하반신 마비가 이미 올 줄을 알고 있었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이는 스티븐의 양심이 자신의 의료 사고에 대해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않느냐는 폭로다.
양심의 추적에 쫓기는 스티븐은 마틴의 요구에 대해서 굴욕적으로 굴종한다. 괜히 마틴에게 선물을 사주고, 바보처럼 마틴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준다. 이는 마치 마틴이 스티븐을 조종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틴에게 이러한 주술적 권능을 부여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정당한 피의 복수자의 권한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스티븐의 양심의 가책이다.
그런데 스티븐만 쫓기지 않는다. 나중에는 온 가족이 쫓긴다. 아마도 아빠의 과실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킴은 마틴을 사랑함으로써, 더 노골적으로는 자신의 육체를 줌으로써 속죄를 원하고, 애나는 마틴의 발에 입 맞추는 굴욕을 감수한다. 그러나 스티븐의 선물이나 킴의 육체, 애나의 키스로도 속죄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균형이 회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마틴을 죽이려고 한다. 이는 피의 복수자를 제거함으로써 추적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에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식의 부정의를 현실에서 수도 없이 보아왔다.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얼마나 손쉽게 제거될 수 있는지 우리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사법 현실에서,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로부터, 남미의 부패한 정부로부터 보아왔다. 스티븐이 지하실에서 마틴을 죽이고 정원에 파묻었다면 영화는 훨씬 현대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은 차마 그리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피의 복수를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틴을 죽여도, 피의 복수의 추적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인도의 카르마, 바벨로니아의 함무라비, 유대교의 토라, 이슬람교의 코란, 알바니아의 카눈 등이 한결같이 피의 복수가 신의 요구라고 규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복수는 신의 뜻이다!
만일 스티븐이 끝내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죽여 속죄하지 않는다면 밥, 킴, 그리고 애나까지 모두 하반신 마비, 거식증, 안구출혈, 그리고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먼저 밥이, 그 다음 킴이 하반신 마비와 거식증이 시작되었다. 아직 애나에게는 증상이 없다. 이제 곧 애나도 침대 신세를 질 판이다. 이러한 저주는 속죄를 회피한 대가다. 이것은 마틴을 죽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스티븐 가족에게 내려진 저주는 형이상학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대체 그러한 형이상학적 저주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애나를 멀쩡한 상태로 남겨둠으로써 스티븐이 발설한 저주가 정말로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인 상태로 남겨 놓고 있다. 이 지점에서 영화 감독은 다시 한 번 관객을 가지고 논다. 관객에게는 마틴의 저주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밥과 킴의 하반신 마비 증상이 모두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스티븐 가족이 느꼈을 혼란을 대리체험하게 한다. 바로 이러한 모호성이 이토록 지루한 영화를 보는 관객을 혼란과 초긴장 상태로 붙잡아 둘 수 있었고, 졸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엽기적인 부분은 애나가 논리적으로 사고했을 때, 킴과 밥 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지점이다. 왜 그녀의 논리적 사고에 자신을 배제했을까? 실제로는 스티븐의 희생 제의에 그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스티븐도 마찬가지다. 박찬욱의 <박쥐>처럼 왜 스티븐은 모든 것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자살하지는 않는 것일까? 실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모습에서 사랑 많은 부모의 신화는 산산이 부서진다. 영화 속에서 부모는 헌신적이고 사랑 많은 부모가 아니라 킴의 고백과 같이 '생명의 수여자'로서의 권능을 누리는 '주인'이고, '왕'이다.
오히려 킴은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죽겠다고 나선다. 부모보다 자식이 더 낫다. 하지만 왜 킴은 자신이 가족들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말한 뒤, 마틴과 같이 도망가자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이를 거부하자 킴은 혼자 도망쳤을까? 킴의 희생에 대한 고백은 참이었을까? 거짓이었을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스티븐이 킴과 밥 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고 마음 먹은 뒤, 학교 선생님을 찾아간 대목이다. 그리고 두 아이들의 성적을 묻는다. 대체 왜 그는 아이들의 성적을 물은 것일까? 그는 킴과 밥 중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릴 것인지를 아이들의 성적으로 판단하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고대인이라면 능히 했음직한 스티븐의 행동의 이러한 원시성은 현대인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킨다. 아니 어떻게 인간을 ‘쓸모’로 판단한단 말인가? 하지만 결국 학교 선생님은 스티븐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는다. 밥은 수학과 물리학에 뛰어나고, 킴은 음악과 문학에 소질이 있다. 하지만 스티븐은 계속 채근 댄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아빠로서의 스티븐의 무책임함이 하늘을 찌른다.
이 영화의 압권은 단연 스티븐의 희생 제의다. 고대적인 인신 제사를 연상시키는 이 장면에서 관객은 영화의 엽기적인 전개에 할 말을 잃는다. 영화에서 스티븐은 모든 가족들의 눈을 가린다. 그리고 자신도 눈을 가린다. 왜 모두 눈을 가렸을까? 무책임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지만 선택할 수 없는 스티븐이 할 수 있는 나름의 최선이었다. 아마도 그는 모든 것을 우연에 맡김으로써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는 참 적절한 해법이었다. 제비뽑기는 고대인들이 신의 뜻을 묻는 흔한 방법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만일 스티븐 가족에게 내려진 이 저주가 형이상학적인 것이고, 만일 그것이 신으로부터 온 저주였다면, 제비뽑기를 통해서 죽을 사람을 신에게 정하도록 한 것은 적절한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이 끔찍하게 잔인한 희생제의를 통해서 밥이 가장 나이어린 희생제물이 되었다. 실제로 고대세계에서 어린 아이는 자주 희생제물이 되곤 했다.
희생 제사는 효과를 발휘했다. 스티븐 가족은 저주에서 풀려났다. 스티븐이 처음 마틴을 만났던 펍에서 밥이 빠진 스티븐 가족은 음식을 먹었다. 거식증이 치유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펍을 빠져나갔다. 하반신 마비도 고쳐진 것이다. 그러나 마틴은 이를 그저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그는 이제 힘을 잃었다. 왜냐하면 피의 복수가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해피엔딩인가? 마틴의 말대로라면 균형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해피엔딩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마틴의 그 절망적인 표정은 무엇인가? 이는 균형의 회복이 마틴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피의 복수의 한계가 드러난다. 균형의 회복은 그저 명분일 뿐 마틴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한 손에 채권증서를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스티븐과 그의 가족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티븐을 자신의 아버지로 만들고자 했고, 킴의 사랑을 훔치고자 했고, 자신의 발에 입 맞추는 애나를 지켜보고자 했다. 채권의 행사가 마틴의 바라는 바였다.
애나가 마틴에게 묻는다. 왜 자신과 아이들이 남편의 실수에 대해서 대가를 치러야 하느냐고.. 이때 마틴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횡설수설한다. 그는 뜬금없이 자신이 스파게티를 먹는 모습이 아빠가 스파게티를 먹는 모습과 신기할 정도로 똑같다는 말을 한다. 여기까지만 말을 했더라면 마틴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아버지와 저는 연결되어 있어요. 마찬가지로 스티븐과 당신 가족들도 연결되어 있어요. 그러니 당신 아버지의 실수에서 당신 가족들도 자유로울 수 없어요.”
그런데 마틴은 엉뚱한 말을 한다. 알고 보니 스파게티를 먹는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이 먹더라는 것이다. 자신과 아빠만 스파게티를 포크로 돌돌 말아서 먹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방식으로 스파게티를 먹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마틴은 분노했다고 하다. 이것은 마틴의 논리가 오류임을 드러내는 반대증거다. 그것이 마틴을 화나게 한 것이다. 자신의 채권 의식이 근거가 없음이 드러났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마틴이 스티븐의 잘못에 대해서 그 가족이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애나 말대로 근거가 없음이 드러났다. 마틴의 채권은 근거없다. 마틴이 주장하는 채권의식은 마치 악성 고리대금 업자의 부정의한 채권 증서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마틴은 자신의 채권에 대한 권리 행사를 포기할 마음이 없다. 근거는 없다. 하지만 마틴은 자신의 채권의식이 정당하다고 그냥 막무가내로 주장한다. 그러면서 기껏 한다는 말이 "그것이 정의와 가깝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로 마틴의 채권 의식은 정의가 아니다. 정의를 빙자한 폭력일 뿐이다. 따라서 스티븐이 밥을 죽임으로써 마틴이 요구한 대로 채무이행을 하고, 균형이 회복되고, 정의가 실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틴은 회복되지 못한다.
영화는 마틴의 요구가 어째서 역사 속에서 피의 복수가 폭력과 살상의 무한 순환으로 그토록 쉽게 발화하는지를 보여준다. 한 명이 죽었으나 마틴은 세 명의 목숨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것이 정의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세 명이 목숨을 잃는다면 이제 다시 그에 대한 복수의 권리는 스티븐에게 넘어오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세 가지 비극을 상상할 수 있다. 첫째로, 우리가 현실 속에서 자주 목격하는 바대로 복수가 실현되지 않는 부정의한 사회다. 특히 현대 사법 제도가 사적 복수의 권리를 국가에게 귀속한 후로, 국가 공권력과 사법 제도의 부패로 복수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다.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부정의한 현실을 얼마나 자주 목격하는가.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이 염원하는 검찰 개혁과 사법 개혁의 요구는 그러한 비극적 현실에 대한 분노가 만들어내는 요구다. 이것이 첫 번째 비극이다.
두 번째로, 마틴의 바라는 대로 정의를 빙자한 지배과 채권 행사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가 아니며, 정의를 빙자한 폭력일 뿐이다. 그것은 필연 폭력과 살상의 무한 순환으로 귀속될 것이다. 영화의 모티브가 되는 아가멤논 가족의 비극이 그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두 번째 비극이다.
세 번째로,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동해보수의 원칙에 근거한 복수가 시행됨으로써 균형을 되찾는 것이다. 정확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복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쉽지 않겠으나 이러한 복수가 잘 이루어진다면 폭력과 살상의 무한 순환으로 빠지지 않은채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결말이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틴의 표정이 보여주듯 그것은 정작 피해자인 마틴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이것은 박찬욱의 영화가 잘 보여준다. <올드 보이>에서 우진(유지태)은 대수(최민식)에게 복수를 하지만 자살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이영애)는 백선생(최민식)을 죽여 땅에 파묻었지만 여전히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복수의 근원적 한계는 복수가 이미 저질러진 피해를 아무것도 복구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이 류를 죽여도 물에 빠져 죽은 딸이 살아나지 않는다. 정의가 실현되더라도 구원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세 번째 비극이고, 이 영화의 비극이다.
이 세 가지 비극의 가능성을 보고 기독교인이 기독교의 ‘회개’를 들이밀고 싶은 유혹이 생겨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의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봤을 때, 기독교의 회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는 제니에게 말한다. "잘 들어둬.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지만 죄를 지었으면 속죄해야 하는 거야. 속죄 알어? 큰 죄를 지었으면 크게, 작은 죄를 지었으면 작게… 알았지." <킬링 디어>에서 킴이 엄마에게 병원에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지만 애나는 따귀로 되돌려 갚는다. 회개는 아무런 정의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박찬욱이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생각인 듯 하다. '회개'는 아예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구원은 그 어디에 있을까?
'담임목사 >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뉴스 오브 더 월드> 리뷰: 이야기의 힘(the power of story) (2) | 2021.02.24 |
---|---|
2세기 초대교회 vs. 21세기 한국교회 (0) | 2020.09.23 |
성경 속의 부동산 투기: 고대 이스라엘의 토지제도와 야훼 신앙 (0) | 2020.09.07 |
[영화평]정지영의 <사라진 시간>: 불교적 세계관을 영화화하다 (0) | 2020.07.29 |
십일조 논쟁과 초대교회의 헌금 (0) | 2020.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