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애굽기 20장 1-17절
#기독교 강요 제 2권 제 8장: 도덕적 율법(십계명) 해설


기독교 강요 제 2권에서 가장 긴 장은 8장 십계명에 관한 해설 장입니다.
오늘은 십계명에 대한 해설에 대해서 살펴볼 예정인데요,

우리는 앞서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사법적 성격을 넘어서  인간의 마음을 규정하는 도덕법이 본질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율법을 결코 지킬 수 없으며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율법이 갖는 심오한 도덕법적 특성 때문이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으로 인해 절망할 수밖에 없고, 구원자 그리스도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제 오늘은 십계명을 살펴보면서 이 논증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율법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의식법, 시민법, 그리고 도덕법입니다. 
십계명은 이 세 가지가 다 포함되지만 압도적으로 도덕법으로서의 성격이 많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토라가 함무라비 법전과 근본적으로 다른 특징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일종의 민형사적 법률로 제국의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는 사법체계입니다. 
그러나 토라는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모으는 지침입니다. 
즉 토라는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길과 사람 앞에서 바로 행하는 법을 알려주는 지침인 것입니다. 이것이 십계명의 서문이 “나는 ..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자기 선언으로 시작하는 이유죠. 
이런 점에서 토라의 원형은 요셉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어떤 사람인가요? 옛 말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요셉이 그랬어요. 
그는 토라도 없는 시절에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했습니다. 토라 없이 토라를 잘 지킨 요셉의 삶이 바로 토라의 정신이에요.
하지만 함무라비 법전은 법이 선포되고, 그 법을 어기면 처벌하는 사법체계일 뿐입니다.
토라도 없이 토라를 지켰던 요셉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작 토라가 주어졌음에도 요셉처럼 토라를 지키며 살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그들이 아예 토라를 무시했느냐? 그건 아닙니다. 그들은 토라의 규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문자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문자만 지키며 살았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키라는 규정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스라엘의 장사치들은 안식일을 지킨다고 물건을 떼다가 성문 앞에서 지키고 서있습니다. 왜냐? 토요일 저녁, 안식일이 끝나는 순간 물건을 성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장사를 하겠다는 것이죠. 이들은 안식일을 문자적으로만 지킨 겁니다. 그런데 사법 체계로는 이것을 뭐라할 수 없어요.
왜요? 법을 지켰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뭐라 하십니다. 그건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니까요.

며칠 전 ‘신림동 강간 미수 영상’이 공개된 적이 있습니다. 
신림동에서 집으로 귀가하는 한 여성을 30대 남성이 뒤쫓는 cctv 영상이었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여성의 문이 닫히는 바람에 여성은 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만 하마터면 큰일날뻔 했습니다. 
처음에 경찰은 이 남성을 주거침입 혐의로만 수사를 했다고 하죠.
왜요? 모두가 봐도 명백하게 강간미수일지라도 실제 행위가 일어난 건 아니니까요.

함무라비법전은 본질적으로 이와 같아요. 그리고 이것은 모든 법률 체계의 공통된 특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토라만은 이런 법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들은 토라의 글자만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짓이라며 책망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7-8]

수 천 마리의 양,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 맏아들, 몸의 열매... 이것은 다 의식법이죠. 
의식법을 잘 지킨다고, 제사를 잘 지낸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냐? 천만에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문자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실천하기를 원하신다 이 말씀이에요.
우리는 이런 관점으로 십계명을 해석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십계명을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겠죠. 하나는 문자적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해석입니다. 
문자적 해석은 자구에 매인 해석이고, 영적 해석은 그 본 취지에 맞는 해석입니다.

2. 십계명 해석
1) 1계명 - 3절: 첫 번째 계명은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입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상숭배하면 안 된다. 그래서 모든 미신을 거부하지요.
어떤 그리스도인은 제사도 안 드리고, 단군상 목따고, 불상에 라카칠 합니다. 또 어느 권사님은 산을 다니시다가 돌로 쌓아놓은 돌단을 허물어뜨리는 분이 계십니다. 1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른 실천일까요?

#1계명을 영적으로 해석해 해봅시다.
이 계명은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마음과 사랑과 충성을 바치라는 계명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의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모든 우상들을 거부해야 하는데, 왜냐? 우상이 우리 인간을 소외시키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돈의 노예, 학교나 회사의 노예, 성공의 노예, 가족이나 가문의 노예, 탐욕과 욕정의 노예, 자아도취(나르시시즘)의 노예.... 그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노예가 되면 안 됩니다.

어떤 목사님은 세계에서 가장 큰 십자가를 한국에 만들자고 후원금을 모집하셨다고 하죠.
또 세계에서 가장 큰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이것은 뭘까요? 크기를 우상숭배하는 것 아닙니까?

공장 직원이 백혈병으로 죽어나가는데 이를 뻔히 알고도 조치를 하지 않고 공장을 돌린 모 반도체 회사는 뭘 숭배한 것인가요? 자본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 아닙니까?
한*총에서는 남한도 전술핵을 배치해 핵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핵무기를 우상으로 섬깁니다. 
첫 번째 계명은 이러한 인간적인 수단들을 거부하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우상을 멀리할 때 가장 인간다워진다는 거? 이것이 첫 번째 계명의 의미입니다. 

2) 2계명 - 4절: "우상을 만들지 말라. 혹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
일단 이 계명은 1계명과 차이가 있는데, 1계명이 다른 신들을 겨냥하는 계명이라면 2계명은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이 주된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이슬람교나 여호와증인은 십자가나 예수님의 초상화나, 모자이크 등을 일절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면 형상을 만들어도 된다는 얘기입니까? 가톨릭교회에서는 소위 이콘(성상)을 예배에 사용하는데요, 우상숭배 논란을 피하기 위해 '예배'와 '흠숭'이라는 단어를 구분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 노력들이 다 이 계명을 문자적인 해석하는 방식이에요.

얼마 전 야당의 황모 대표가 어느 사찰에 가서 합장을 거부한 것 때문에 이슈가 되었는데요, 언뜻 보면 그는 2계명을 잘 지킨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러나 사진 찍고 싶어서였겠죠. 그 분은 문자적인 차원에서 이 계명을 잘 지키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계명을 영적으로 해석해 봅시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을 눈에 보이는 사물로 도구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의 신성한 힘을 전쟁에 이용하려고 했어요.
어떤 이들은 우림과 둠밈을 통해 미래의 일을 점 치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뭔가 물건에 신적인 힘이 있다고 믿고, 그것에 현혹됩니다.
가톨릭교회는 사제의 축성으로 물이 신성해진다고 말하고, 어느 기도원에서는 기도받은 성수는 치료효과가 있다고 돈을 주고 팔기도 했습니다. 
둘째 계명은 오직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신성이나 신적인 능력은 없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그 어떠한 사물을 숭배하는 주술이나 흑마술, 점, 신비주의는 모두 2계명을 범하는 죄입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시선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 분의 성품을 묵상하고 예배하는 데에 집중해야 합니다.

둘째 계명은 올바른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데요,
성경은 하나님의 올바르고 유일한 형상이 뭐라고 가르치나요? 인간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우리는 우리 이외의 다른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면 안 되요.
즉 이 계명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계명입니다.

2050년까지 로봇과의 섹스가 인간과의 섹스를 완전히 대체하리라는 예고가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육체적인 노동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노동까지 대체하리라는 예고도 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과연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심각하게 제기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저는 이 둘째 계명이 다가올 미래 시대에 인간 문명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3) 3계명 - 7절: 셋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문자적 해석을 하는 사람은 'Oh my God!' 'Jesus Christ!' 이런 감탄사를 쓰지 말라고 합니다.
미국 법정에서는 성경에 손을 얹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말하겠노라 맹세하는데,
아나뱁티스트 그룹 중에서는 이 계명 때문에 법정 맹세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모두 문자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영적 해석을 해보면, 맹세는 우리의 말이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말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말은 모든 진리의 판단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것이며,
우리는 진리의 이름으로 자신의 거짓말을 진실하다고 우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는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내가 편한 대로 하나님도 그러실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상황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아니십니다. 어떤 상황을 자기 멋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말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또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고 말할 때 이 계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천의 어느 교회 목사 사모는 하나님의 뜻이라며 성도에게 굴, 해삼, 멍게를 먹으라고 예언했고, 피로회복제를 285,000원을 주고 팔았는데요, 알고 봤더니 간장이었다고 하죠.
이것이 바로 셋째 계명을 어긴 범죄에요.
ex) 한*총 대표 전*훈 목사가 야당의 황모 대표를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고 말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죠.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축복하거나, 저주하는 일을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4) 4계명 - 8절: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고신측 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토요일에 주일에 쓸 물건을 사두었다고 하죠.
고3인데도 일요일에 예배를 출석하라고 요구하고, 목사님이 주일성수 안 하면 저주받는다는 설교를 하는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적인 해석입니다.

#이 말씀을 영적으로 해석해볼까요?
우리는 사실 이 명령이 '일하라'는 명령과 같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9절)

사도바울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일하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본분이죠. 어떤 사람은 돈이 많아서 여행 다니고 놀고 먹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돈이 많건 적건 인간에게 6일간 힘써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노동에는 생계노동도 있고, 예수님처럼 사람을 살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노동도 있겠죠.
어떤 노동이든 인간은 일해야 합니다. 일하지 않는 것은 넷째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한 뒤 하루를 쉬라고 하셨습니다. 왜냐? 하나님도 그렇게 하셨으니까요.(11절)
이는 일과 쉼의 사이클, 곧 삶의 조화를 이루라는 말씀이죠. 워라밸은 성경에서 나온 원리입니다. 이 계명은 또한 무한정한 생산 욕망과 경제 성장 경쟁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끝도 없이 돈을 긁어모으지 말고, 브레이크를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이 계명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소망으로 살라는 명령임을 알아야 합니다. 장차 들어갈 하나님나라에서 안식할 것을 소망하며 살라는 것이죠.
주일이 소중한 것은 그 소망의 삶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5) 5계명 - 12절: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문자적으로 이 계명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명령으로 좁게 해석합니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용돈도 드리고, 여행도 시켜드리라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이 계명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권위에 대한 순종을 명하는 계명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계명을 부모를 넘어서  직장 상사나 학교 선생님, 정부와 관료까지 확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질서를 세우셨는데,  질서를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권위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원하십니다.

한*총의 대표 전*훈 목사는 대통령을 사탄이라고 말하고, 하야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는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입니다.

아담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우리는 권위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세계관에 물든 우리는 권위에 대들고, 반항하는 것이 주체적이고, 창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모님의 권위가 사실은 하나님 자신의 권위를 나누어주신 것이라고 하십니다.
권위가 얼마나 합리적이냐와 무관하게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권위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합리적 권위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 비합리성이 내 기준이니까요. 내가 볼 때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권위에 불순종하겠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태도입니다.

하지만 모든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만일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한다면 그 권위는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며, 그리스도인들은 그 권위에 맞서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우리는 부모님께, 상사에게, 선생님께, 연장자에게, 지도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6) 6계명 - 13절: 살인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이 계명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면 사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계명과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중에 살인자가 있나요?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계명을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이 계명의 새 의미를 알게 되죠.
이 계명의 영적 의미는 뭘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을 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죽음의 문화에 휩싸여 있습니다. 죽음의 문화 때문에 죽는 이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렇게 죽어가는 이들을 죽게 내버려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변에 강도 만난 이웃이 죽어가고 있는데 레위인과 제사장은 지나갔어요. 이게 살인입니다.
결국 이 여섯 번 계명은 사람을 살리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죽어가지 못하도록, 살도록 온 힘을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살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죽어가는데도 내버려두고 계십니까?

또 이 계명은 살인의 동기가 적의고, 살의고, 증오고, 미움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일3:15]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미워하기를 그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워하기를 그칠 수 있어요?
무관심할 수는 있어도 미워하기를 그칠 수는 없지요. 미워하지 않는 최선의 길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계명은 사랑하라는 계명이에요.

7) 7계명 - 14절: 간음하지 못한다.
#문자적으로 해석해봤을 때, 우리 중에 간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안 그런가요?
문자적으로만 보면 간음은 혼외정사를 말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봤을 때,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어떻게 확대 해석될 수 있을까요?
순결하라!라는 계명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일단 여기서 순결은 성관계를 하지 않은 ‘동정’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결한 처녀’라는 표현이라든지, 처녀성의 상실을 순결이 더럽혀졌다는 표현과는 무관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순결은 충성(loyalty) 혹은 정조(fidelity)와 가깝습니다.
명심보감에 '충신불사이군, 열녀불경이부'(忠臣不仕二君, 貞女不更二夫)'라는 말이 있는데요, ‘사()’나 ‘경()’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요즘 표현으로는 양다리나 삼다리, 사다리, 오다리, 이런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것이 깨끗하다는 말의 성경적인 의미입니다. 때문에 일차적으로 이 계명은 혼외정사를 금지한 것이지만, 마음으로라도 다른 남자나 여자를 흠모한다면 이는 불결한 것입니다.

때문에 이 계명은 성을 상품화하고 있는 시대에 심각한 도전을 주는 말씀이에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심각한 도전입니다.  
도처에 섹스어필하는 광고, 마음을 훔치는 문화 컨텐츠가 가득합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순결을 유지하며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기혼자에게도 어렵고, 미혼자에게도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경제수준이 높은 국가에서 평균 결혼 연령이 30대를 넘어선 것 역시도 큰 문제지요. 
혈기왕성한 남녀 청년들이 거의 20년 동안 성이 상품화되어 있는 세상에서 마음의 순결을 지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현대인들은 이 계명을 어느 수준으로든 깨뜨리고 있어요. 
특히나 가상 현실 섹스와 섹스 로봇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만일 기혼자가 섹스 로봇과 성관계를 했다면 이는 혼외정사일까요?
우리는 이 계명을 영적으로 해석해봐야 하는데요, 혼외정사 맞습니다.
만일 일 중독에 빠져서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 역시도 간음이나 다름 없습니다.
앞으로 이런 추세가 더욱 심해질 것인데, 우리 자녀 세대는 얼마나 이 계명을 어기며 살게 될지 참으로 걱정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남편/아내를 더욱 몸과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8) 8계명 - 15절: 도둑질하지 못한다.
#문자적으로 도둑질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죠.
사실 어린 시절 엄마 지갑의 돈을 훔치거나 옆 친구 지우개를 훔치는 정도의 도둑질이 아니라면 우리 중에 도둑질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해석하면 이 계명은 각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것을 누리게 하라!가 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토지 제도와 희년 제도를 통해서 이것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기업을 주시고, 각자가 일해서 먹고 살게 하셨어요.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토지 제도를 어기는 것이 도둑질이에요.

아합왕은 이미 충분한 땅과 궁이 있었어요. 그러나 나봇의 포도원이 갖고 싶었어요.
그래서 돈을 주고 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도둑질이에요.
밭갈아 먹고 사는 땅을 돈주고 사서 취한다면 나봇은 더 이상 밭갈아 먹고 살 수 없게 되잖아요. 돈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 돈이야 다 쓰면 그만이죠. 아합은 그렇다치고 아합의 자손들은 어떻게 먹고 삽니까?  이스라엘의 토지 제도는 당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대대로 자신의 기업을 받아 누리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일종의 지속 가능한 경제 모델이었지요.

고고학 발견을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초기 이스라엘 유적에서는 집들이 다 똑같다는 거에요. 
하지만 후기 유다와 이스라엘 지층을 파보면 대주택, 중주택, 소주택이 섞여 있다는 거에요. 
이게 무슨 뜻인가요? 빈부격차가 생기고, 부동산 투기가 생기게 되었다는 거에요. 
예언자들은 바로 이것을 도둑질이라고 성토했어요.
오늘날 수 십 채, 수 백 채의 집을 가지고 집값을 높이는 이들도 다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업하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희소하게 해서, 노동자를 억압하는 것도 도둑질이에요.
이 시대의 희년 제도는 모두가 일자리를 나눠갖는 것이 될 것입니다.
도둑질은 각 사람이 누릴 소득과 번영의 기회를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 한 가족 먹고 살 만큼 필요한 재산은 하나님의 분깃입니다. 그보다 많은 재산은 다 남의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맨발의 목사, 최춘선 할아버지를 아십니까?
그는 김포 근처의 땅을 모두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거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에게 다 땅을 나눠줘버렸다고 하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으니까,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그건 내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한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는 수준 이상의 부를 가지고 있다면 내것이 아닌 것을 맡게 되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부 그 자체만으로는 도둑질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도 함께 넉넉하게 살도록 애쓰지 않으면 그게 도둑질이죠
모두가 함께 넉넉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9)9계명 - 16절: 너희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지 못한다. 
#문자적으로 보면 법정에서 위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요,  
청문회 때 뻔뻔스럽게 위증을 한 사람이 많이 있었어요.
하지만 솔직히 우리 중에 법정 증인으로 출석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그런데 영적으로 보자면 이 계명은 우리가 어떤 의도에서든지 진실에서 벗어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만 진실을 말하거나, 일부 진실과 일부 거짓을 섞는 것도 거짓이죠.
누군가 우리의 거짓으로 피해를 보게 되니까요.
장*연 사건과 관련해서 목격자들이 여러 명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침묵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 거짓말과 다름없습니다. 물론 그 분들에게는 생명의 위협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위선도 거짓입니다. 죄를 안 지은 척 하는 것도 거짓말이고요, 의로운 척, 도덕적인 척 하는 것도 거짓말이죠. 목사로서 저도 이런 위선과 외식의 유혹에 참 많이 빠집니다.
또한 누군가 뒤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지 않은 말을 하는 것도 넓게 보면 이웃에게 불리한 증언에 속합니다. 
누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명예나 위신을 깎아 내리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이면 예하고, 아니오 이면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있는 어린 아이 같은 투명한 영혼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10) 마지막 계명은 ‘너희 이웃의 집/이웃의 아내/남종/여종/소/나귀/이웃의 소유도 탐내지 못한다’는 것인데요,
언뜻 보면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라는 계명과 겹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계명의 핵심은 ‘탐내지 말라’는 것, 즉 마음과 관련된 법입니다.
대한민국 법률 체계에 ‘탐내지 말라’는 법을 집어 넣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죠.
즉 우리는 십계명이 결국 마음에 관한 법이라는 사실을 마지막 계명을 통해 알 수 있어요.
십계명은 그러니까 의식법이나 시민법을 넘어선 마음을 규정하는 도덕법인거에요.
탐심은 모든 범죄의 바닥에 존재하는 죄에요.


얼마 전 미#새라는 프로그램에서 김*국씨가 옷을 갈아입는데, 한 패널이 그러더군요.
‘와, 저 등 근육 탐난다.’ 10계명을 어긴 거죠. ㅎㅎ
광고가 뭡니까? 탐나게 하는 것 아닙니까? 광고 디자이너는 그럼 어떻게 되는 걸까요? 10계명을 어기게 하는 것이죠. ㅎㅎ
sns는 또 어떻습니까?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식당, 여행지 사진 찍어 올리면 그걸 본 사람의 마음은 어때요? 탐심이 생기죠. 역시 10계명을 어기게 하는 잘못입니다.
'좋아요' 숫자로 자신의 인기를 구가하고 싶은 것도 어찌보면 탐심 아닙니까?
현대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엔진이 뭡니까? 욕망, 곧 탐심이죠.

여러분, 슬프게도 우리 문명은 10번째 계명의 위반 위에 서 있어요. 그러니 인간은 원죄를 지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왜 우리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탐심을 억제 할 수 있나요? 탐내지 말아야지!! 그러면 탐 안 내지게 되나요?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길은 뭘까요? 무소유? 아닙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아낌없이 주면 탐심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십시오. 주기를 즐거워 하십시오. 그러면 점점 탐심에서 멀어지죠.

십계명을 보고 뭘 느끼셨어요? 절망을 느끼신다면 잘 하신 겁니다. 
그렇게 하려고 율법이 있는 거에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뭡니까? 구원자에요.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자가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건져주셔야 해요. 
열 가지 계명을 어긴 우리는 죄와 악, 저주의 바다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십계명을 모두 지킨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누구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계명을 문자적으로 지키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완전히 지키셨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십계명의 완전한 구현체를 보게 됩니다. 
십계명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은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요. 
십계명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손 붙잡고 인도하는 몽학선생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십계명의 완성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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