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복음 21장 33-46절
#기독교강요 제 2권 6장: 타락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찾아야만 한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똑같이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사용하지만 굉장히 다른 모습입니다.
기독교는 아담의 죄를 단지 첫 번째 죄가 아니라 원죄라고 믿습니다.
그 죄가 원죄이기 때문에 후손들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고야 만다고 가르칩니다.
확률적으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코 구제불능에 빠져 있으며, 반드시 절망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필연코 절망의 상태,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며, 그래서 구원자가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 구원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에 비해 유대교는 원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죄는 원죄라기보다는 순서상 첫 번째 범죄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원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물론 아담처럼 인간은 많은 경우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실패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회개하고 각성하면 인간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구원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율법교사(랍비)나 혹은 종교적, 정치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유대교인들은 기독교가 구약에 없는 새로운 이단적 가르침을 고안해 냈다고 말합니다.
사실 구약에는 하나님 이외의 예배를 받을 만한 다른 존재가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죠.
하나님의 독생자가 존재하신다는 얘기도 없구요,
또 군사적 지도자로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여러 메시아들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친아들이 메시아가 된다는 얘기도 찾아보기 쉽지 않고,
더구나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얘기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본다면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비판이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마도 오늘 본문이 유대교의 그런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포도원에 관한 비유의 말씀인데,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먼저 전반부 33-36절을 간단히 개관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여러 가지 많은 비유들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집주인: 하나님
#포도원: 이스라엘 땅이나 가나안 땅, 혹은 예루살렘
#울타리: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국경선
#농부들: 이스라엘 백성들(구약 백성)
#(포도)열매: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을 뜻하는데, 결국 율법대로 사는 삶 곧 순종
#포도즙/주 :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 내야 하는 삶의 열매
#소출(소작료): 하나님의 백성의 선한 삶의 열매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
포도열매나, 포도즙과 포도주, 추가적으로 즙짜는 틀은 모두 율법을 잘 지켜서 행하는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망대: 깨어서 이스라엘을 지키는 존재로서, 선지자라고 할 수 있고, 성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세로 주고 멀리 떠났다: 이것은 1세기 당시 당시 로마 시민이니 외지인 중에 이스라엘 땅을 사서 소작 맡기는 부재지주를 염두에 둔 비유입니다.
당시 이런 부재지주가 많았고, 이스라엘 안에는 외지인의 땅을 위탁하여 농사짓는 소작농이 많았습니다.
보통 소작료는 50:50 비율로 책정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1세기 관습을 비유로 구약적 상황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소출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냄: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셔서 율법을 순종하는 삶을 사는지 살펴보게 하셨다는 뜻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침: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고, 비난하고, 심지어 살해하였음
실제로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왕이나 백성들에 의해서 순교당했습니다.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한 두 명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보내셨는데, 그때마다 이스라엘이 똑같이 행했다는 말씀입니다.
33-36절은 당시 유대 사회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배경에 깔려 있기는 하지만 이 말씀에서 우리는 구약성경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살 땅을 주시고, 율법을 주시면서 순종하도록 부탁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도 안 할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을 잡아죽였다.‘ 뭐 이런 내용이죠.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런 취지로 예언의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렘35:14중-15] "~ 그러나 너희들은, 내가 직접 말하고, 또 거듭하여 말했으나,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내 종 예언자들을 모두 너희에게 보내고, 또 거듭하여 보내면서 권고하였다. 각자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고, 행실을 고치고,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쫓아다니지 말라고 하였고, 그래야만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나에게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고, 나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비유의 전반부인 33-36절은 예레미야 35장 말씀을 재인용하고 계신 겁니다. 사실 이것은 구약 전체의 요약이기도 하죠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은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 전, 광야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두 가지 길에 대해서 말씀하신 본문입니다.
언뜻 보면 이 말씀은 순종하면 축복, 불순종하면 저주가 내릴 것이니 순종의 길을 택하라고 권면하시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만, 사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쬐금 순종하지만 불순종은 어마무시하게 많이 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신명기 32장에서 모세는 노래를 지어 부릅는데, 이 노래는 마치 유언과 같습니다. 모세는 이 노래를 마치고 죽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노래에서 이스라엘이 반드시 불순종을 할 것이며, 그래서 끝내 저주를 받고야 만다고 노래하고 있어요.
아직 나라를 세우기도 전에, 축복을 쏟아 부어도 모자랄 판에 모세는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를 낳은 바위를 버리고, 너희를 낳은 하나님을 잊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격분하셔서, 당신의 자녀들과 인연을 끊으시고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나의 얼굴을 숨기겠다. 그들이 마침내는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겠다. 그들은 타락한 세대, 진실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자들이다.”[신32:18-20]
나라마다 건국이념을 담은 건국설화가 참 많잖아요.
그런데 혹시 이런 식의 내용이 담긴 건국설화를 보신 적이 있는지요.
건국시조가 이제 막 나라를 세우면서 자기를 따르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들아, 너희는 내가 주는 이 계율을 잘 지키면 크게 번성한 나라가 될 것이고, 계율대로 살지 않으면 반드시 망할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장담하건대 너희들은 내가 주는 계율대로 살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 나 먼저 간다. 바이바이~”
세상에 이런 건국신화가 어디에 있어요.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이 뭔지 아십니까?
이것이 정확히 3천년 이스라엘의 역사에 딱 들어맞더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서 불순종하면 벌어질 일들을 읽어보세요. 이것은 정확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요.
그리고 이것이 오늘 본문인 33-3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구약성경은 창세기(아담의 불순종)에서 시작해서 말라기서 시절의 불순종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을 주셨고, 시내산에서 토라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불순종하고, 불순종하고, 불순종해서 끝내 멸망하고 만다는 것이 구약이야기죠.
이러한 구약이야기를 두고 기독교 신학자들이 ‘원죄’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원죄는 조직신학적이고, 교리적인 개념으로 여러 가지 부수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역사적인 개념도 들어 있습니다. 마치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이스라엘 역사는 순종보다는 불순종으로 심하게 기울어 있는 것이에요. 왜요? 원죄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 성경은 여타 종교적인 가르침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컨대, 코란에 따르면 지존자 알라의 명령에 인간은 절대로 불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다른 과일을 따먹은 것처럼 창세기를 편집했구요, 그나마 그것도 의도적으로 따먹은 것이 아니라 건망증 때문에 모종의 과일을 먹었다고 편집해놓고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한 번 볼까요.
프로메테우스는 신이었으나 최고신 제우스에게 불순종하여 독수리에게 간이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코린트왕 시지푸스는 신을 무시했다고 해서 무거운 바위를 쉬지 않고 산으로 밀어올리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간 마르시아스는 음악의 신 아폴론보다 피리를 더 잘 분다고 악기 연주 대회에 도전했다가 껍질이 벗겨져서 죽었습니다.
심판을 보던 마이다스왕은 ‘신은 인간을 까닭없이 벌하지 않습니다. 신의 정의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항의는데, 아폴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신은 인간이 무릎을 꿇을 때에만 자비롭다.’
그리고 마이다스 왕의 귀도 당나귀 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처럼 다른 신화나 종교에서 인간은 신의 명령에 감히 불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신화들과 비교해 봤을 때, 성경은 참으로 희한한 책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고, 범죄하고, 또 범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고, 참고, 또 참는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33-36절 말씀의 핵심인데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과 행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2)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스스로 죽음에 처합니다.
3) 하나님은 참으시고, 종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명령(율법)에 순종하라고 촉구하십니다.
4) 인간은 그 종을 때리고, 돌로 치고, 죽여 버립니다.
5) 하나님은 또 참으시고, 또 종을 보내셔서 순종하라고 촉구하십니다.
6) 그러나 인간은 또 그 종을 때리고, 돌로 치고, 죽여 버립니다.
7) 이제 포도원 주인의 입장에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 포도원 주인, 곧 하나님이 이 상황에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종을 보낸다 한들 상황이 나아지겠습니까? 전혀 가망성이 없습니다. 막다른 골목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 짤막한 이야기는 구약성경 전체의 요약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보편 인류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2천 년 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교회의 역사는 범죄의 역사였습니다.
교회의 역사도 이스라엘 역사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선한 역사를 이루지 않으시면 교회는 어떻게 되었나요?
늘 막다른 골목에 처박히고 말았습니다. 철저하게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를 보십시오.
한국교회가 스스로 자정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못합니다.
한국교회는 스스로 그 어떤 선한 일도 만들어낼 수 없는 상황에 빠져버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남 이야기 할 것 없습니다. 우리 각자 자신을 돌아보더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는 늘 죄와 악으로 기웁니다.
바울은 탄식했습니다.
[롬7:22-24]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유의지가 없어서가 아니에요. 인간은 자유의지로 악을 행하는 것이에요.
선을 몰라서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율법(구약성경)이 우리에게 선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어요. 이스라엘은 선이 무엇인지 알았어요. 하지만 악을 행하고 말았어요.
바울이 말하듯 우리 인간은 양심이 있어서 선이 무엇인지 알아요.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노력도 해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의 의지로 선이 아니라 악을 행하고 마는 거에요.
그로 인해 절망에 빠져버린 인간 이야기가 오늘 비유의 전반부입니다.
2. 이제 37절부터 이 이야기의 후반부에 접어듭니다.
37절: “마지막으로”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약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예언자들을 보냈습니까?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예레미야 등등등...
하지만 그 많은 예언자들의 권고를 이스라엘 백성은 끝끝내 거역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멸망했고, 남유다도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어요.
모세의 말대로 끝끝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포로 사건은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번의 징계 중 하나가 아니고 마지막 징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레위기와 신명기에도 나와 있는 말씀이에요. 반복적으로 불순종하면 끝내 하나님께서는 낯선 타국에 포로로 잡혀 돌아가시게 하고야 말 것이라고 했는데요,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어요. 이것이 바로 바벨론 포로 사건이죠. 한 마디로 바벨론 포로 사건은 마지막 심판이며, 종말적 성격의 징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유다 백성을 포로에서 돌아오게는 하셨습니다.
하지만 포로 귀환은 완전한 회복이 아니었어요. 여전히 이스라엘은 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또한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의 상황은 나아졌나요? 일부 나아진 점도 있기는 했습니다만, 유다 백성들은 여전히 죄악의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포로 후기(제 2 성전기) 상황이 말해주는 것은, 더 이상 보낼 종도 없고, 종을 보내봐야 결과가 똑같을 것이 뻔한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편에서는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노아홍수 때처럼 인간을 완전히 진멸할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 남은 카드를 쓸 것인가?
마지막 남은 카드는 뭡니까? 예언자들 대신에 '자기 아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구약이 끝나고 신약이 시작됩니다.
37절: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아들을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였다."
이 본문은 마가복음 병행구로 읽어야 더 제 맛이 납니다.
[막12:6]"이제 그 주인에게는 단 한 사람, 곧 사랑하는 아들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였다."
세상에 이런 정신 나간 주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흉폭한 피고용인이 말을 안 들으면, 짤라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실제로 당시 부재지주에게 성실 납부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군대를 보내서 철저하게 응징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과 비교해 본다면 예화 속의 주인은 물러 터져도 너무 물러터진 것이지요.
종을 보냈는데 죽여다? 그럼 곧바로 응징을 해야지 외아들을 보내시겠다?
진짜로 정신 나간 주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우리 하나님이 이런 분이십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이처럼’입니다.
하나님이 죄와 악과 불순종으로 물든 이 세상 사람들을 진짜로 징하고 징하게도 사랑하사 최후의 하나 남은 아들 독생자까지 내어 주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사랑에 눈이 먼 분이십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종교 이야기에서 이런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외아들을 보내시는 포도원 농부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는 구원자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서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었다면 인간은 선을 행했을 것이고, 구원자는 필요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면 되는 것이죠.
모든 인간이 선을 행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반타작은 할 것 아니겠습니까?
반타작이 많다면 1/3타작은 할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것도 많다면 1/10타작은 할 수 있었을 것 아닙니까?
반의 반의 반타작이라도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율법을 지킬 수 있었다면 구원자는 필요없습니다. 소수의 인간이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선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율법의 순종에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습니다. 가능성은 사라졌습니다.
인간 안에서 구원의 가능성이 완전히 막혀버린 상황에서 남은 길은 단 하나,
인간 밖에서 구원의 가능성이 인간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자력 구원이 아니라 은총 구원입니다.
2) 두 번째로, 구약은 필연적으로 신약을 요청한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은 예수님 이야기가 구약과는 무관하게 예수의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구약의 이야기의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23:35]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인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차고 넘쳤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구약의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보내고 보내고 또 보냈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예언자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다 죽여버렸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야기죠. 구약은 더 이상 보낼 종이 없는 상태로 끝납니다. 이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히든 카드로 보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약 이야기는 신약이야기를 필연적으로 요청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정통한 히브리서 기자도 자신의 편지의 서두[히1:1-2]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히1:1-2]
히브리서 기자는 자신의 편지글의 전체 내용을 통해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신약은 구약 안에 전제되어 있고, 구약은 신약 안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3) 세 번째로,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오늘 이야기는 주인이 아들을 보냈는데, 그 아들까지 죽여버리는 인간의 가공할 만한 악마성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 악마성에 대한 하나님의 해법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하셨던 일은 예언자와는 다른 일이었습니다.
예언자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율법을 말해주고, 율법의 준수를 독려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일도 하셨으나, 예수님은 율법 준수에 실패한 자들을 구원해 주러 오셨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사람은 선생이 아니라 구원자였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잡혀 죽기 위해서 오셨어요.
예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어서 인간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도전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악마성에 희생당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악마성이 극치에 이르는 것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요.
아담의 반역의 완성태가 십자가였습니다.
동시에 그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극치였습니다.
그 사랑의 극치는 하나님의 용서의 극치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자 이제 심기일전해서 율법을 지켜라’가 아니고,
‘너희의 악마성을 너희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라.’
‘너희의 악을 정직하게 인정하라.’
그리고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은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알콜 중독자가 자신의 힘으로 중독을 이길 수 없듯이 우리 힘으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알콜 중독자가 자신의 무능력을 선언하고 외부의 존재에게 도움을 구할 때만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듯이, 우리도 구원자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중보자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십니다.
여러분, 이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이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얻으실 것입니다.3) 세 번째로,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오늘 이야기는 주인이 아들을 보냈는데, 그 아들까지 죽여버리는 인간의 가공할 만한 악마성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 악마성에 대한 하나님의 해법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하셨던 일은 예언자와는 다른 일이었습니다.
예언자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율법을 말해주고, 율법의 준수를 독려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일도 하셨으나, 예수님은 율법 준수에 실패한 자들을 구원해 주러 오셨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사람은 선생이 아니라 구원자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나요?
히브리서 2장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육신'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똑같은 유혹을 받으시고, 우리와 똑같은 율법의 요구를 받으셨으나,
우리와 달리 율법을 다 지키시고, 완전한 의를 성취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죽으셨습니다. 왜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요.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잡혀 죽기 위해서 오셨는데요, 그래서 우리를 사망과 심판, 저주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우리 손으로 잡아 죽였어요.
예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어서 인간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도전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악마성에 희생당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불순정의 결과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죽이는 짓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어요.
그리하여 우리의 악마성이 극치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아담의 반역의 완성태가 십자가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십자가를 가리키며, 십자가 안에서 완성됩니다.
동시에 그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극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잡아 죽일 줄을 다 아시고, 일부러 순순이 삽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왜냐?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정이요, 하나님의 용서의 극치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자 이제 심기일전해서 율법을 지켜라’가 아니고,
‘너희의 악마성을 너희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라.’
‘너희의 악을 정직하게 인정하라.’
그리고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은총을 구하라. 그리하면 용서를 받을 것이다’였습니다.
알콜 중독자가 자신의 힘으로 중독을 이길 수 없듯이 우리 힘으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알콜 중독자가 자신의 무능력을 선언하고 외부의 존재에게 도움을 구할 때만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듯이, 우리도 구원자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중보자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십니다.
여러분, 이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이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얻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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