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가 땅으로 임할 때' by 신광은

 

 

 '메가처치 논박,' '천하무적 아르뱅주의'의 저자 신광은 목사의 ''하나님 나라가 땅으로 임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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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가 땅으로 임할 때 - YES24

하나님 나라가 땅으로 임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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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가 땅으로 임할 때

하나님 나라, 천국, 천당은 어떻게 다른가? 하늘과 하늘 나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성도는 죽은 뒤, 어디로 가는가? 휴거는 있는가? 부활의 몸은 어떤 몸인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구원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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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가 땅으로 임할 때 | 신광은 - 교보문고

하나님 나라가 땅으로 임할 때 | 하나님 나라, 천국, 천당은 어떻게 다른가? ⚫ 하늘과 하늘 나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 성도는 죽은 뒤, 어디로 가는가? 휴거는 있는가? 부활의 몸은 어떤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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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은 이 영화의 모티브가 에피게니아에 대한 오래된 그리스의 비극에서 가져왔음을 암시한다. 에피게니아는 영화 속 킴이 에세이를 쓰고 발표를 해서 A+를 받은 과제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여러 판본이 있는데, 그 대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케네 왕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여신의 숲에서 그녀의 사슴을 활로 쏘아 죽인 실수에서 이 비극이 시작한다. 여신은 자신의 사슴을 죽인 대가를 아가멤논에게 요구한다. 얼마 후, 아가멤논의 동생이자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가 아내인 헬레나 왕비를 트로이의 왕자 팔리스에게 빼앗긴 것에 분노하여 그 대가를 치루게 해달라고 형에게 요청한다. 아가멤논은 동생의 청을 받고 거대한 그리스 연합군을 꾸려서 트로이로 출정하고자 했다. 하지만 아르테미스 여신은 연합군 내에 역병이 창궐하게 하고 바다에 역풍이 불게 해서 트로이 출정을 막았다. 그리스 연합군이 출정하기 위해서는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가멤논은 자신의 큰 딸 에피게니아의 목숨을 바쳐야 했다. 에피게니아의 목숨을 대가로 바친 후 비로소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트로이로 출정하여 10년의 긴 전쟁 끝에 승전하고 돌아온다. 하지만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녀는 남편이 딸을 죽인 죄의 대가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클리템네스트라는 그녀의 딸 엘렉트라에 의해서 다시 죽임을 당한다. 엘렉트라는 엄마가 아빠를 죽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 오래된 그리스 비극은 끝도 없이 반복되는 피의 복수에 의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피의 복수는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 에토스가 자리하고 있다. 이 영화의 낯설음은 이러한 원시적 에토스가 현대적 상황 속에 불쑥 그 모습을 드러낸 데서 온다. 그러나 사실 원시적으로 보이는 피의 복수는 우주가 카오스(혼돈)가 아니라 코스모스(질서)이어야 한다는 세계관적 실천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고, 우주적 공리다. 만일 정의가 없다면 우주는 카오스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전쟁은 버틸 수 있어도 카오스는 견딜 수 없다.

 

정의의 원칙은 단순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곧 '대가'다. 마틴이 스티븐의 팔을 물었다. 스티븐의 고통을 해결할 방법이 무엇일까? 사과(apologize)? 만져줌? 아니다. 똑같이 마틴의 팔을 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비유고, 상징이다. (이것은 이 영화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진리다. 이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비유고, 상징이다.) 그러나 그 비유를 관통하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정의는 '균형을 되찾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사슴(sacred deer)이 죽었다면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아가멤논의 사슴 같은 존재인 에피게니아가 죽어야 한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이 균형의 회복이다.

 

이 영화는 스티븐의 심장 수술 장면으로 시작한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수술복과 수술 장갑은 스티븐의 수술 실패를 암시한다. 실제로 스티븐의 실수로 마틴의 아버지가 죽었다. 심장전문의 스티븐이 수술에 실패한 것은 그가 수술 전에 술을 마셨기 때문이다. 의료사고였다. 그렇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스티븐의 대가 지불을 통해서 균형이 바로 잡힘으로써 끝난다. 스티븐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바로 아들 밥을 죽이는 것이다.

 

대가의 지불이라는 모티브는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온다. 애나는 남편 스티븐의 수술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스티븐의 동료 매튜에게서 듣고 싶어한다. 그러자 매튜는 애나에게 정보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다.  스티븐이 방수 200미터 짜리 시계를 마틴에서 선물한 것도 일종의 대가의 지불이다. 마틴은 스티븐에게 선물을 받은 뒤, 자신도 선물을 준비한다.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틴이 스티븐의 가족 식사에 초대를 받았으니 그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가족 식사 자리에 마틴을 초대한다.

 

스티븐과 애나는 자녀들에게 상냥하기만 한 부모가 아니다. 종종 두 사람은 자녀를 학대하는 부모로 변신해서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데, 이 역시 부모가 대가를 요구하는 존재로서, 심판자 행세를 하기 때문이다. 밥이 머리를 깍지 않는 불순종 행위에 대해서 스티븐이 대가를 요구하고, 킴이 엄마에게 욕한 행위에 대해서 애나는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그러한 대가 요구 행위가 지나치게 원시적으로 나타나서 충격을 주는 것이지 프로이트의 말대로 사실은 모든 부모는 응징의 집행자로서 자녀에게는 신적 존재다.

 

이 영화에서 관객을 당황시키는 지점은 마틴의 불가해한 능력이다. 처음 펍에 나타난 마틴은 덜 떨어진 지적 장애인처럼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마틴은 마치 샤만 같은 주술적 존재가 된다. 그가 정의를 부르짖을 때, 그에게서 박찬욱의 영화 <올드 보이>의 신학적이고 철학적 담론을 쏟아내는 이우진이 어른거린다. 대체 그는 누구이며, 왜 그에게는 이런 초능력이 존재하는 것일까?

 

감독이 마틴을 장애인처럼 묘사한 것은 탁월한 전략이었다. 영화 초반 1/3 정도 관객의 호기심을 끌어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마틴의 불가해한 정체였으며, 특히 그가 지적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관객의 궁금증은 극대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애인 설정은 극 초반의 강력한 텐션의 부여할 뿐만 아니라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미셀 푸코와 같은 이들이 잘 지적했듯이, 고대인들에게 광인이나 장애인은 종종 신과 접촉할 수 있는 영매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마틴은 신이 없는 현대 세계에서 마치 신적인 존재처럼 활개치며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마틴의 장애인 설정이 그의 광적이고, 신적인 존재로 변모해 갈 때, 관객에게 가해진 충격은 배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틴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복수에 관한 고대인들의 관습, 곧 에토스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고대인들은 친족이 살해를 당하면 자연스럽게 그 가족에게 복수의 권리가 생긴다고 믿었다. 복수는 권리이면서, 동시에 의무다. 이것은 현대 형법 제도가 정착하면서 사적 복수의 권한을 국가에게 귀속시키기 전까지는 늘 그러했다. 영화에서는 현대적 의미의 형법 제도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스티븐의 의료 과실에 대해서 그는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오로지 마틴의 사적 복수의 권한만 보인다. 현대 형법 제도 이전에 있었던 고대적인 복수의 에토스가 마틴에게서 체현되었다. 고로 마틴의 주술적 권능은 고대 세계에서 누구나 알고 있었던 피의 복수자에게 주어지는 마땅한 권능이다.

 

마틴이 요구하는 것은 피의 복수다!

 

제 가족을 죽였으니 선생님의 가족을 죽여야 균형이 맞겠죠?”

 

피의 복수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은 늘 따라다닌다. 마틴이 스토커처럼 스티븐을 따라다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마틴이 따라다니기 전에 먼저 스티븐의 양심이 그를 뒤쫓는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26:17] 스티븐은 이미 2년이나 지난 사건이지만 여전히 쫓기고 있었다. 마틴은 스티븐에게 밥의 하반신 마비가 이미 올 줄을 알고 있었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이는 스티븐의 양심이 자신의 의료 사고에 대해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않느냐는 폭로다.

 

양심의 추적에 쫓기는 스티븐은 마틴의 요구에 대해서 굴욕적으로 굴종한다. 괜히 마틴에게 선물을 사주고, 바보처럼 마틴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준다. 이는 마치 마틴이 스티븐을 조종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틴에게 이러한 주술적 권능을 부여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정당한 피의 복수자의 권한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스티븐의 양심의 가책이다.

 

그런데 스티븐만 쫓기지 않는다. 나중에는 온 가족이 쫓긴다. 아마도 아빠의 과실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킴은 마틴을 사랑함으로써, 더 노골적으로는 자신의 육체를 줌으로써 속죄를 원하고, 애나는 마틴의 발에 입 맞추는 굴욕을 감수한다. 그러나 스티븐의 선물이나 킴의 육체, 애나의 키스로도 속죄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균형이 회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마틴을 죽이려고 한다. 이는 피의 복수자를 제거함으로써 추적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에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식의 부정의를 현실에서 수도 없이 보아왔다.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얼마나 손쉽게 제거될 수 있는지 우리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사법 현실에서,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로부터, 남미의 부패한 정부로부터 보아왔다. 스티븐이 지하실에서 마틴을 죽이고 정원에 파묻었다면 영화는 훨씬 현대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은 차마 그리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피의 복수를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틴을 죽여도, 피의 복수의 추적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인도의 카르마, 바벨로니아의 함무라비, 유대교의 토라, 이슬람교의 코란, 알바니아의 카눈 등이 한결같이 피의 복수가 신의 요구라고 규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복수는 신의 뜻이다!

 

만일 스티븐이 끝내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죽여 속죄하지 않는다면 밥, , 그리고 애나까지 모두 하반신 마비, 거식증, 안구출혈, 그리고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먼저 밥이, 그 다음 킴이 하반신 마비와 거식증이 시작되었다. 아직 애나에게는 증상이 없다. 이제 곧 애나도 침대 신세를 질 판이다. 이러한 저주는 속죄를 회피한 대가다. 이것은 마틴을 죽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스티븐 가족에게 내려진 저주는 형이상학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대체 그러한 형이상학적 저주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애나를 멀쩡한 상태로 남겨둠으로써 스티븐이 발설한 저주가 정말로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인 상태로 남겨 놓고 있다이 지점에서 영화 감독은 다시 한 번 관객을 가지고 논다. 관객에게는 마틴의 저주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밥과 킴의 하반신 마비 증상이 모두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스티븐 가족이 느꼈을 혼란을 대리체험하게 한다. 바로 이러한 모호성이 이토록 지루한 영화를 보는 관객을 혼란과 초긴장 상태로 붙잡아 둘 수 있었고, 졸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엽기적인 부분은 애나가 논리적으로 사고했을 때, 킴과 밥 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지점이다. 왜 그녀의 논리적 사고에 자신을 배제했을까? 실제로는 스티븐의 희생 제의에 그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스티븐도 마찬가지다. 박찬욱의 <박쥐>처럼 왜 스티븐은 모든 것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자살하지는 않는 것일까? 실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모습에서 사랑 많은 부모의 신화는 산산이 부서진다. 영화 속에서 부모는 헌신적이고 사랑 많은 부모가 아니라 킴의 고백과 같이 '생명의 수여자'로서의 권능을 누리는 '주인'이고, '왕'이다.

 

오히려 킴은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죽겠다고 나선다. 부모보다 자식이 더 낫다. 하지만 왜 킴은 자신이 가족들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말한 뒤, 마틴과 같이 도망가자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이를 거부하자 킴은 혼자 도망쳤을까? 킴의 희생에 대한 고백은 참이었을까? 거짓이었을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스티븐이 킴과 밥 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고 마음 먹은 뒤, 학교 선생님을 찾아간 대목이다. 그리고 두 아이들의 성적을 묻는다. 대체 왜 그는 아이들의 성적을 물은 것일까? 그는 킴과 밥 중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릴 것인지를 아이들의 성적으로 판단하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고대인이라면 능히 했음직한 스티븐의 행동의 이러한 원시성은 현대인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킨다. 아니 어떻게 인간을 쓸모로 판단한단 말인가? 하지만 결국 학교 선생님은 스티븐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는다. 밥은 수학과 물리학에 뛰어나고, 킴은 음악과 문학에 소질이 있다. 하지만 스티븐은 계속 채근 댄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아빠로서의 스티븐의 무책임함이 하늘을 찌른다.

 

이 영화의 압권은 단연 스티븐의 희생 제의다. 고대적인 인신 제사를 연상시키는 이 장면에서 관객은 영화의 엽기적인 전개에 할 말을 잃는다. 영화에서 스티븐은 모든 가족들의 눈을 가린다. 그리고 자신도 눈을 가린다. 왜 모두 눈을 가렸을까? 무책임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지만 선택할 수 없는 스티븐이 할 수 있는 나름의 최선이었다. 아마도 그는 모든 것을 우연에 맡김으로써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는 참 적절한 해법이었다. 제비뽑기는 고대인들이 신의 뜻을 묻는 흔한 방법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만일 스티븐 가족에게 내려진 이 저주가 형이상학적인 것이고, 만일 그것이 신으로부터 온 저주였다면, 제비뽑기를 통해서 죽을 사람을 신에게 정하도록 한 것은 적절한 방법인 것이다. 그리고 이 끔찍하게 잔인한 희생제의를 통해서 밥이 가장 나이어린 희생제물이 되었다. 실제로 고대세계에서 어린 아이는 자주 희생제물이 되곤 했다.

 

희생 제사는 효과를 발휘했다. 스티븐 가족은 저주에서 풀려났다. 스티븐이 처음 마틴을 만났던 펍에서 밥이 빠진 스티븐 가족은 음식을 먹었다. 거식증이 치유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펍을 빠져나갔다. 하반신 마비도 고쳐진 것이다. 그러나 마틴은 이를 그저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그는 이제 힘을 잃었다. 왜냐하면 피의 복수가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해피엔딩인가? 마틴의 말대로라면 균형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해피엔딩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마틴의 그 절망적인 표정은 무엇인가? 이는 균형의 회복이 마틴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피의 복수의 한계가 드러난다. 균형의 회복은 그저 명분일 뿐 마틴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한 손에 채권증서를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스티븐과 그의 가족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티븐을 자신의 아버지로 만들고자 했고, 킴의 사랑을 훔치고자 했고, 자신의 발에 입 맞추는 애나를 지켜보고자 했다. 채권의 행사가 마틴의 바라는 바였다.

 

애나가 마틴에게 묻는다. 왜 자신과 아이들이 남편의 실수에 대해서 대가를 치러야 하느냐고.. 이때 마틴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횡설수설한다. 그는 뜬금없이 자신이 스파게티를 먹는 모습이 아빠가 스파게티를 먹는 모습과 신기할 정도로 똑같다는 말을 한다. 여기까지만 말을 했더라면 마틴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아버지와 저는 연결되어 있어요. 마찬가지로 스티븐과 당신 가족들도 연결되어 있어요. 그러니 당신 아버지의 실수에서 당신 가족들도 자유로울 수 없어요.”

 

그런데 마틴은 엉뚱한 말을 한다. 알고 보니 스파게티를 먹는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이 먹더라는 것이다. 자신과 아빠만 스파게티를 포크로 돌돌 말아서 먹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방식으로 스파게티를 먹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마틴은 분노했다고 하다. 이것은 마틴의 논리가 오류임을 드러내는 반대증거다. 그것이 마틴을 화나게 한 것이다. 자신의 채권 의식이 근거가 없음이 드러났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마틴이 스티븐의 잘못에 대해서 그 가족이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애나 말대로 근거가 없음이 드러났다. 마틴의 채권은 근거없다. 마틴이 주장하는 채권의식은 마치 악성 고리대금 업자의 부정의한 채권 증서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마틴은 자신의 채권에 대한 권리 행사를 포기할 마음이 없다. 근거는 없다. 하지만 마틴은 자신의 채권의식이 정당하다고 그냥 막무가내로 주장한다. 그러면서 기껏 한다는 말이 "그것이 정의와 가깝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로 마틴의 채권 의식은 정의가 아니다. 정의를 빙자한 폭력일 뿐이다. 따라서 스티븐이 밥을 죽임으로써 마틴이 요구한 대로 채무이행을 하고, 균형이 회복되고, 정의가 실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틴은 회복되지 못한다.

 

영화는 마틴의 요구가 어째서 역사 속에서 피의 복수가 폭력과 살상의 무한 순환으로 그토록 쉽게 발화하는지를 보여준다. 한 명이 죽었으나 마틴은 세 명의 목숨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것이 정의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세 명이 목숨을 잃는다면 이제 다시 그에 대한 복수의 권리는 스티븐에게 넘어오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세 가지 비극을 상상할 수 있다. 첫째로, 우리가 현실 속에서 자주 목격하는 바대로 복수가 실현되지 않는 부정의한 사회다. 특히 현대 사법 제도가 사적 복수의 권리를 국가에게 귀속한 후로, 국가 공권력과 사법 제도의 부패로 복수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다.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부정의한 현실을 얼마나 자주 목격하는가.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이 염원하는 검찰 개혁과 사법 개혁의 요구는 그러한 비극적 현실에 대한 분노가 만들어내는 요구다. 이것이 첫 번째 비극이다.

 

두 번째로, 마틴의 바라는 대로 정의를 빙자한 지배과 채권 행사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가 아니며, 정의를 빙자한 폭력일 뿐이다. 그것은 필연 폭력과 살상의 무한 순환으로 귀속될 것이다. 영화의 모티브가 되는 아가멤논 가족의 비극이 그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두 번째 비극이다.

 

세 번째로,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동해보수의 원칙에 근거한 복수가 시행됨으로써 균형을 되찾는 것이다. 정확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복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쉽지 않겠으나 이러한 복수가 잘 이루어진다면 폭력과 살상의 무한 순환으로 빠지지 않은채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결말이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틴의 표정이 보여주듯 그것은 정작 피해자인 마틴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이것은 박찬욱의 영화가 잘 보여준다. <올드 보이>에서 우진(유지태)은 대수(최민식)에게 복수를 하지만 자살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이영애)는 백선생(최민식)을 죽여 땅에 파묻었지만 여전히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복수의 근원적 한계는 복수가 이미 저질러진 피해를 아무것도 복구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이 류를 죽여도 물에 빠져 죽은 딸이 살아나지 않는다. 정의가 실현되더라도 구원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 세 번째 비극이고, 이 영화의 비극이다.

 

이 세 가지 비극의 가능성을 보고 기독교인이 기독교의 회개를 들이밀고 싶은 유혹이 생겨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의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봤을 때, 기독교의 회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는 제니에게 말한다. "잘 들어둬.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지만 죄를 지었으면 속죄해야 하는 거야. 속죄 알어? 큰 죄를 지었으면 크게, 작은 죄를 지었으면 작게알았지." <킬링 디어>에서 킴이 엄마에게 병원에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지만 애나는 따귀로 되돌려 갚는다. 회개는 아무런 정의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박찬욱이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생각인 듯 하다. '회개'는 아예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구원은 그 어디에 있을까?

 

 

인간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 같지만 실은 이야기가 인간을 만든다. 이야기는 세계이다. 어떤 이야기를 선택하느냐는 어떤 세계 속에 사느냐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심리적으로 병든 사람들은 대부분 비합리적 신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한 마디로 '좋지 않은 이야기' 속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치료란 그 비합리적 신념을 건강하고 합리적 신념으로 바꾸는 작업을 포함하는데, 바꿔 말하면 나쁜 이야기를 떠나서 '좋은 이야기'로 옮겨와야 한다는 뜻이다.

 

<뉴스 오브 더 월드>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 치료 과정을 볼 수 있다. 팔리씨가 지배하는 작은 도시 이래스에서 사람들은 팔리씨가 만든 이야기 속에 살고 있다. 이래스에서는 들소 사냥, 노동력 착취, 인종 차별, 인디언 학살과 같은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는데, 시민들은 그러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팔리씨의 이야기 속에 속해 있었다는 뜻이다. 심지어 존 캘리는 팔리씨에 의해 가족인 토미가 죽임을 당했음에도 그의 이야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토미는 질문하고 소리쳤기 때문에 팔리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한 마디로 팔리씨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살해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꾼인 키드 대위는 하퍼스가 읽으라고 하는 <이래스 저널>의 이야기 대신 <하퍼스 일러스트레이티드>가 전하는 펜실베니아의 작은 마을인 킬런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 이야기는 그들이 들어왔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이야기는 남부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북부 사람들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야기를 전하던 중 팔리는 키드 대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읽으라고 한다. 이때 키드 대위는 투표를 제안한다.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지 스스로 선택(!)하도록 투표하자고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킬런의 이야기를 선택한다.

 

킬런의 이야기는 저항의 이야기였다. 소도시 킬런은 팔리씨의 도시와 비슷하게 소수의 자본가들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탄광 도시였다. 탄광에 불이 나서 많은 광부들이 죽었다. 그런데 살아남은 11명의 생존자들은 자신들의 지배자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문명의 기둥들을 뿌리뽑았다. 킬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이래스 사람들은 팔리가 지은 이야기 속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다른 이야기 속에 속하기로 선택한다. 그리고 그들은 팔리씨의 지배에 항거한다. 존 캘리도 더 이상 팔리씨의 지배를 거부하고 토미의 복수를 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의 힘이다.

 

사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조해나가 말의 등잔을 쓸어주면서 인디언 말로 부른 노래 속에 들어 있다.

 

들소들이 전부 죽어가/

선택을 해야 해/

맞서든지, 영원히 쓰러지든지

 

영화의 배경은 남북 전쟁 직후 남부 텍사스였다. 북부는 전쟁에서 승리했고, 남부는 패배했다. 이는 북부의 이야기가 남부의 이야기를 눌렀다는 뜻이다. 북부의 이야기는 수정헌법 13, 14, 15조를 통해서 드러난 미합중국의 통일에 관한 이야기이고, 노예제 폐지에 관한 이야기, 전쟁 부채 상환에 관한 이야기다. 남부의 이야기는 남부 독립과 노예제 존치, 그리고 맥시칸, 흑인, 인디언들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이다. 승리한 북부의 이야기는 패배한 남부 사람들에게 충성 맹세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버리고 북부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많은 남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패배한 것에 큰 상처를 받았다. 키드 대위 역시 남부군 출신으로 패잔병이다. 그리고 드문드문 보이는 북부 군인과 치안관의 존재가 북부 이야기의 승리를 상기시키고 있으나 텍사스인들은 아직 자신들의 이야기를 놓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아직도 자신들의 이야기로 삶을 지속하려는 시도들이 난무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야기의 교체기에서 벌어지는 혼란 상황이 바로 영화 속의 배경이다.

 

이야기의 교체기에서 키드 대위가 뉴스를 전하는 뉴스맨으로 등장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혼재하고 있으며, 그래서 수많은 세계들이 뒤섞여 있다. 그러한 혼란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결정해야 한다.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세계를 만들 것인지를 말이다. 뉴스맨이 할 일은 사람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 청자들로 하여금 그 이야기 속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이다. 그래서 키드 대위는 말한다.

 

사람들에게 선택권을 준 것 뿐이에요.”

 

새로운 이야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단순히 동화책 전집 중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서 읽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킬런 사람들이나 이래스 사람들처럼 이야기 속에 들어가 산다는 뜻이며, 자신이 사는 세계를 새롭게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이야기를 떠나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문명의 기둥을 뽑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선택한다는 뜻은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뜻이다. 하여 그것은 혁명을 동반한다.

 

하지만 이러한 혁명은 무엇보다 먼저 내면에서 시작된다. 곧 정체성의 변화로부터 시작한다. 영화 속의 조해나에게는 세 개의 이름, 곧 세 개의 정체성이 있다. 첫 번째로 그녀는 조해나 리언버거이다. 그녀는 독일 이민자 가족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아마도 그녀의 가족은 백부와 백모가 속한 것과 같은 이야기, 곧 어메리컨 드림이라는 이야기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이민자로서 낯선 땅에서 끊임없이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끔찍한 비극으로 인해 다른 이야기로 대체되고 말았다. 다른 이야기는 인디언들이 만들어준 이야기다. 그녀의 가족은 인디언에 의해 죽임당했으며, 그녀는 인디언에 의해 길러지게 되었다. 그녀는 돌아가는 물세 개의 점이라는 이름의 새 부모 밑에서 시케이다라는 이름의 인디언으로 길러지게 되었다. 조해나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디언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사납고, 미국인의 옷을 거부하며, 마치 저주에 걸린 듯 행동한다. 그리고 키드 대위가 알려주는 조해나라는 자신의 독일 이름도 거부한다.

 

하지만 북군에 의해 카이오와족은 쫓겨나고 그녀는 키드 대위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가 그녀에게 다가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새 이야기는 그녀에게 새 정체성을 준다. 그것은 바로 조해나 키드라는 이름이다. 결국 그녀는 키드 대위의 딸로 입양된다. 조해나라는 이름을 거부했던 그녀이지만 조해나 키드라는 이름은 받아들인다. 첫 번째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 그리고 첫 번째 정체성과 두 번째 정체성은 모두 그녀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주어졌다. 그러나 세 번째 이야기와 정체성은 유일하게 그녀가 선택한 이야기이고,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인 정체성이다.

 

이야기는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목적지도 결정한다. 영화 속에서 목적지는 종종 ’(home)으로 불린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독일 이민자의 딸 조해나의 목적지는 캐스트로빌이다. 그곳에는 독일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만일 조해나가 여전히 독일 이민자의 딸이 맞다면 그녀가 돌아갈 곳은 캐스트로빌이다. 키드 대위가 목숨을 걸고 조해나를 캐스트로빌의 백부의 집으로 데려다 주고자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조해나는 이곳을 자신의 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조해나는 독일 이민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디언 부족 카이오와족의 이야기 속에 속해 있기 때문에 자신을 인디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녀는 카이오와족이 사는 곳을 자신의 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집에 데려다 달라고 말하는 것이나, 레드리버 타운에서 한밤중에 탈출해서 강 건너편 인디언 부족과 합류하고자 소리 지른 것은 그 때문이다.

 

세 번째 이야기 속에서 조해나는 조해나 키드가 된다. 이제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목적지는 바뀐다. 집은 키드 대위와 함께 하는 것이다. 집은 장소가 아니다. 키드 대위가 그녀의 집이다. 마지막 씬에서 그녀는 키드 대위의 뉴스 전하는 일을 돕는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웃음을 보인다. 집에 돌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야기는 정체성과 함께 목적지를 결정한다.

 

흥미롭게도 이 모든 것은 정확히 키드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키드 대위는 다른 텍사스 사람들과 같은 이야기 속에 속해 있었다. 아마도 그는 남부 독립을 위해서 싸웠을 것이고, 노예제 존치를 위해서 전투했을 것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그의 집은 샌안토니오였다. 샌안토니오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여 대위는 속히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아내는 콜레라로 죽고 만다. 아내의 죽음은 키드 대위에게 새로운 이야기에 속하도록 만들었다. 자신이 하는 그 모든 일, 곧 자신이 보고, 자신이 했던 그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심리적으로 병든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비합리적 신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키드 대위는 나쁜 이야기 속에 갇히고 말았다. 친구는 키드 대위의 이야기가 비합리적이라고 설득한다. 키드 대위의 부인은 그냥 콜레라로 죽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키드 대위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야기는 쉽게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 속에서 키드 대위는 갈 곳을 잃었다. 샌안토니오는 더 이상 키드 대위의 집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가기를 피하고 있다. 나쁜 이야기 속에서 키드 대위는 '집'(home)을 잃었다. 곧 삶의 목적지와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애써 다른 곳을 향한다. 그는 유리 방황하고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이 도시 저 도시를 전전하며 뉴스를 읽어주고 남쪽으로 내려가고 싶어한다. 그리고 뉴스에 나온 지역들을 돌아 다녀보고 싶어한다. 아마도 키드 대위는 아벨을 죽여서 신의 심판을 받은 가인이 놋땅을 유리 방황하듯이 그렇게 저주 받은 삶을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쁜 이야기 속에서 말이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조해나가 나타났다. 조해나의 집은 캐스트로빌이다. 그리고 캐스트로빌 바로 옆은 샌안토니오다. 키드 대위가 한사코 조해나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하는 것은 샌안토니오를 피하고 싶어서다. 그러나 결국 키드 대위는 일주일도 넘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 캐스트로빌로 조해나를 데려다 주고, 동시에 자신을 샌안토니오, 곧 집으로 데려다 준다. 그리고 그는 버려진 자신의 집에 들르고, 아내의 묘지를 찾는다. 드디어 그는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숙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내의 무덤에서 키드 대위는 이상한 행동을 한다. 결혼 반지를 빼서 아내의 무덤에 두는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것은 그가 전한 마지막 이야기에서 그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 알프레드처럼 죽어 있었다. 의식을 잃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그리고 마치 무덤 속에 묻힌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저주 받은 인간이었으니까...

 

그런데 아내의 무덤을 찾은 순간 그는 그곳에서 생명의 약동을 느낄 수 있었다. , , ... 필사적이고, 틀림없는 생명의 쾅쾅거림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키드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제 그는 옛 이야기를 버리고, 새 이야기에 속하기로 선택해야 했다. 결혼 반지를 빼는 것은 옛 이야기를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아내를 마음 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별하지 못함이 신의 심판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내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신의 심판을 받은 존재라는 비합리적 신념도 벗어버릴 수 있었다.

 

무엇이 그의 가슴을 그렇게 두드렸을까? 아마도 그것은 조해나를 향한 연민과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해나의 얼굴이 살았으나 죽은 자와 방불했던 키드 대위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던 것이다. 쿵 쿵 쿵!!! 그 필사적이고, 틀림없는 생명의 쾅쾅거림을 들은 키드 대위는 죽은 아내와 이별하고 그는 이제 새로운 가족을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곧 과거의 나쁜 이야기와 이별하고 새롭고 좋은 이야기(good news) 속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신의 심판을 받은 존재가 아니다. 도리어 그가 가족을 이루고자 그토록 마음 속으로 소망했던 소원이 성취되었다. 그러니 그는 이제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다.

 

새 이야기는 삶의 이야기고 부활의 이야기다. 그 동안 키드 대위는 죽음의 소식을 많이 전했다. 유행성 수막염으로 97명이 사망했던 이야기, 광산 화재로 19명의 광부가 죽어간 이야기, 레드리버 연락선의 침몰 소식 등등.. 하지만 마지막으로 전한 키드 대위의 이야기는 한 남자가 죽음에서 살아난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새 이야기는 복음, 즉 굿 뉴스(good news)이며, 희망에 관한 이야기이며, 부활의 이야기다.

 

새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에 속한,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함께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기로 결단했다는 점에서다. 그리고 이것은 파편화된 조각난 이야기들이 서로 충돌하고 갈등하는 상황에 대한 참된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멕시코 장벽과 인종 간 갈등, 남부와 북부의 여전한 정치적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트럼프 시대와 작별하고 서로가 조화를 이루며 더 큰 이야기를 만들어 가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것은 광화문에 속한 이야기와 서초동에 속한 이야기가 하나로 통합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영화일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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