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신명기 29장 29절
#기독교 강요:
-제 1권 14장: '성경운 우주와 만물 창조에 있어서도 분명한 표지들에 의해 한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구별하고 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제 1권에서 계시론과 신론, 특히 삼위일체론을 서술한 뒤에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다룹니다.
세계와 인간 창조에 대해서 다루기 앞서 천사론과 마귀론에 대해서 다루는데, 다소 뜬금없다는 인상이 듭니다.
아마도 21세기에 사는 현대인들이 읽기에 그런 느낌이 더 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천사와 마귀가 훨씬 더 현실적이었을 테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오늘은 1권 14장의 천사와 마귀에 대한 칼뱅의 가르침을 잠깐 살펴볼까 합니다.
1. 천사론과 마귀론에 대해서 다룰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원칙이 바로 본문말씀이죠.
온 우주에는 두 가지 지식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지식이 있고, 우리에게 속한 지식이 있다는 겁니다.
일단 이렇게 말하는 순간 세상 사람들, 특히 학문하는 사람들은 거세게 반발할 겁니다.
세상의 지식인들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지식의 한계를 그으려는 이들은 민중에게 무지와 몽매를 퍼뜨려 그들을 지배하려고 한다고 비난을 퍼부을 것입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이성에 재갈을 물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를 ‘자율적 이성’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사고와 자율적 이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유로운 사고는 유익합니다. 하지만 사슬 풀린 개와 같은 자율적 이성은 큰 문제입니다.
1) 자율적 이성이란 첫째로 영역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입니다.
오늘날 어떠한 권위도 이성으로 하여금 ‘여기까지만 탐구하고 이 선을 넘어서지 말라’라고 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지적 탐구가 극히 제한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컨대, 아무나 천문을 탐구할 수가 없었어요. 그것은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늘날 이성은 더 이상 특정 영역에 대해서만 국한하여 지식을 탐구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과학자들은 물질 세계에 대해서 탐구하지만
인간의 내면의 영역, 정신적이고, 심리적이며, 심지어 영적인 영역까지 무제한적으로 지식을 추구합니다.
인간의 이성이 종교적인 영역이나, 영적 영역에 대해서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아마도 그는 분명 엄청난 비판을 받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모세는 우리에게 '오묘한 일' 곧 '인간이 알래야 도저히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으니, 그것은 주님께 속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영역, 곧 '나타난 일'에 대해서만 만족하고 탐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러한 원칙은 칼뱅의 「기독교 강요」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가져서는 안 되는 악덕목이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교만이고, 또 하나는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호기심!’ 입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전반을 걸쳐서 지적 호기심을 악덕목이라고 말했는데요, 오늘 본문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너무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마라. 알아야 할 것만을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라.’
사실 이단이 사람들을 꾈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은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쳐주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죠.
알 듯 모를 듯한 것들에 호기심을 가질 때, 이단이 우리의 영혼을 낚아 채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자율적 이성이란 권위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이성적 추론을 최종심급으로 보겠다는 태도입니다.
더 이상 성경이나 교회가 아니라 이성적 추론으로 최종 판단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 한쪽에는 성경의 가르침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이성의 추론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어느 쪽을 믿을까요?
계몽주의 이후 사람들은 당연히 이성의 추론을 성경 위에 두려고 하죠.
그러나 칼뱅은 기독교가 계시의 종교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계시의 종교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상상하거나 추론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쳐 주신 것을 믿고 따르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전5:2]
이 말씀을 기억히야 합니다.
인간이 갖는 절대적인 한계에 대해서는 과학자들 스스로도 점차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이 소립자의 세계를 관찰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관찰할 만한 도구가 없어서 한계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도 있지만요, 진짜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소립자의 세계를 관찰하려고 할 때,
바로 관찰 행위 자체가 소립자들에게 변형을 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더 재미있는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요,
가령 빛에 대해서 관찰할 때, 관찰자가 빛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 빛이 달리 보인다는 것입니다.
빛이 입자냐, 파동이냐에 대한 물음이 오랫동안 진행되어 왔어요.
그런데 관찰자가 입자라고 생각하고 관찰하면 입자로도 보이고,
반대로 파동이라고 생각하고 관찰을 하면 파동으로도 보인다고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인간은 소립자의 세계에 대해서 고전적인 의미로 객관적인 상태를 영원히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죠.
소립자는 너무 작아서 관찰이 쉽지 않다면, 반대로 너무 커거 관찰이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더 이상 '우주'라는 말을 쓰지 못합니다.
대신에 '관측가능한 우주'라는 말을 씁니다.
관측가능한 우주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있을까요?
관측가능한 우주의 크기를 대략 1천억 광년이고, 그 안에는 약 2조개의 은하가 있으며,
그 중 한 은하인 우리 은하 안에는 태양 같은 별이 4천 억개 정도 있다고 합니다만,
이 모든 것도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가고 관측 도구가 고도로 발달하면 우주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많이 지나도 우리는 절대로 우주에 대해서 고전적인 의미로 객관적인 상태를 알 수가 없어요.
왜냐? 제가 지금 허블망원경으로 우주의 가장 바깥에 있는 별들을 관측했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모습이 아니라 대략 1천 억년 전의 모습입니다.
그럼 지금 이 순간 그 별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우주의 모습은 시간축이 전부 뒤엉켜있는 모습이에요.
1천억년 전의 별의 모습과 500억 년 전의 모습, 1광년 전의 모습, 1시간 전의 모습, 1초 전의 모습이 몽땅 뒤섞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2019년 4월 4일, 오후 4시, 4분, 4초, 이 순간 우주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영원히 알 수가 없죠.
왜요? 그것은 빛의 속도를 뛰어넘어야만 알 수가 있는데, 빛의 속도라는 한계를 인간이 무슨 수로 뛰어넘겠습니까?
왕이나 대사제가 우리에게 알 수 없는 영역을 지정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 대신 빛의 속도가 우리의 지식의 한계를 그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아무리 잘나고, 과학적 발전이 아무리 위대해도, 인간이라는 존재론적 한계, 또한 빛의 속도와 같은 절대적 한계를 인간은 절대로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이에요.
이런 맥락에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했지요.
그런데 모세는 3천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네요.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다. 그것은 주님의 것이다.”
그래서 칼뱅은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교만과 호기심이 아니라 덕목은 겸손과 절제라고 했죠.
어떤 불경건하고 호기심 많은 사람이 노년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물었대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는 무엇을 하고 계셨대요?”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 같이 호기심 많은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오늘 모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뜻이 담긴 율법을 밝히 나타내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은 길이길이 이 율법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참된 지식은 광대한 우주를 다루는 천체물리학이나, 물질의 근원을 탐구하는 양자물리학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아는 지식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성경의 목적은 알쓸신잡 백과사전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구원 얻는 길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덕을 세우는 데 유익이 되는 가르침에 집중해야지
기이한 상상력으로 괴이한 세계로 빠져드는 사색을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는 허튼 소리로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하려 하지 말고, 오직 참되고, 확실하고, 유익한 것들을 가르침으로써 양심을 일깨우는 일을 지상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전공이 무엇이 되었든, 직장이나 관심사나 취미가 무엇이 되었든 그는 성경을 상고하고, 성경이 우리에게 명하는 것에 시선을 집중하며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인식의 방법입니다.
천사와 마귀에 대해서 상상할 때,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늘 견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천사와 마귀에 대해서 극히 적은 부분에 대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교만과 호기심으로 천사와 마귀에 대해서 알려고 다가가면 안 됩니다.
겸손과 절제로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물어보면서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2. 먼저 천사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칩니까?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으나 천사의 창조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이는 천사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많은 지식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나아가는 곳까지 나아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 안에 즐거이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는 천사에 대해서 많은 말들을 떠벌이고 다니는 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중세 가톨릭교회나 유대 신비주의, 혹은 여러 이단들이 천사들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때, 거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천사에 대해서 말해주는 확실한 진리는
1) 첫째, 천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되었든 마귀가 되었든 하나님 이외의 영원히 자존하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천사가 언제 창조되었으며 그 순서는 무엇인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만 창세기 2장 1절에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라고만 되어 있는데요,
여기서 ‘만물’이 ‘만군천사’를 암시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멈춰야 합니다.
어떤 전설에 따르면 천지창조 이전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창조하셨는데, 그 중 루시엘이라는 음악담당 천사가 다른 천사들과 공모하여 반역을 해서 루시퍼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2) 둘째로, 히브리서 1장 14절을 보면 천사는 하나님께서 ‘부리는 영’ 곧 ‘봉사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 때문에 천사의 도움이 필요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거느리심으로써 당신의 왕국을 견고히 세우시며, 그들을 호령하심으로써 당신의 위엄을 드높이시며, 그들을 온 세계에 파송하심으로써 당신의 역사를 효과적이 되게 하시려는 것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천사가 우리 인간의 봉사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재난과 위험으로부터 지키시도록 명하셨습니다.
ex) 그렇다면 수호천사라는 것이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고 했고,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탈옥하여 나타났을 때, 성도들이 그를 수호천사로 착각하지요.
하지만 이런 식의 천사에 대한 과도한 상상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천사들로 하여금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저는 제 삶을 되돌아 볼 때, 천사가 지키셨다고 생각하는 때가 많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ex) 대학생 때 학교 가던 중 일어난 일입니다.
횡단보도를 지날 때였는데, 우측차로가 차량 정체로 꼼짝도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대편 차로는 텅텅 비어 있었거든요.
차량 사이를 지나 막 맞은편 차로에 진입하던 찰라, 정체 중이던 빨간색 승용차가 답답했던 지 중앙선을 넘어서서 전속력으로 저 있는 쪽으로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쪽에서 차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 차가 제 왼쪽 발 앞꿈치를 밟고, 조수석 백미러가 제 배를 긁고 지나갔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순간 저는 천사가 나를 붙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제가 0.1초만 먼저 뛰어나갔더라도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서 이렇게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게 하십니다.
3) 둘째, 천사는 신적 영광을 지니고 있습니다.
천사는 종종 정사, 권세, 능력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또 자주 ‘신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천사들이 신이라는 얘기가 아니고, 하나님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적 영광을 비추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천사는 하나님이 아니며, 천사에게 엎드려 절하거나, 숭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ex) 천사에게 날개가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합니다만,
천사의 날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활동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하면 됩니다.
-> 천사는 인간보다 더 높은 신적 위엄과 영광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보다 훨씬 아이큐도 높고, 힘도 세고, 탁월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천사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 천사에게 집중하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은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나 올라설 수 있느냐?
이런 것으로 치열하게 논쟁했다고 합니다만,
천사는 다만 하나님의 봉사자요, 우리 인간의 봉사자인고로,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기 원하죠.
가령 제가 교통사고로 죽거나 다리가 부러질 뻔 했을 때, 천사의 보호로 그 위험을 무사히 넘겼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천사에게 감사를 표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되는 것이죠.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104:33]
3. 마귀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1) 위대한 문학자이자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는 마귀는 늘 두 가지 거짓말로 우리를 속인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마귀가 존재하지 않는다. vs. 또 하나는 마귀가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천사도 그렇지만, 마귀도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영화를 보니 한 사람이 갈등하는 모습을 천사와 마귀를 등장시켜 표현했더군요.
천사는 그에게 선한 생각을 불어넣어주고, 마귀는 악한 생각을 불어넣어서 고민하는 겁니다.
하지만 천사나 마귀는 단순히 생각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는 마귀, 혹은 사탄이라는 자의 정체를 똑똑히 알아야겠습니다.
마귀와 사탄은 단수이고, 동의어입니다.
마귀 디아볼로스는 분리하는 자라는 뜻이고, 사탄 즉 사타노스는 참소자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우두머리, 혹은 대표자라는 뜻입니다.
그 밑에 여러 귀신들이 있습니다.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하는 귀신도 있고, 자기를 파괴하게 만드는 귀신도 있고,
아마도 맘몬도 그런 귀신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려는 영적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우리는 우주를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주를 선한 신과 악한 신으로 보는 태도는 조로아스터교나 마니교의 특징입니다.
성경은 사탄도 천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로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애초에 악한 사탄을 만들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시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이 암시적으로만 표현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선한 천사들을 창조하셨으나,
그 중 일부가 자유의지를 악용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함으로 사탄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반역하기는 했어도 사탄은 그저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도구일 뿐입니다.
욥기를 보면 사탄은 천사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종이자, 심부름꾼으로 나옵니다.
사탄은 인간보다 뛰어난 지식과 능력이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저 한낱 미물에 불과하죠.
사탄이 제 아무리 하나님을 대적하고, 날뛰어도,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노는 존재입니다.
3) 천사가 하는 일은 우리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에게 유익을 끼치는 봉사자라면,
사탄이 하는 일은 인간을 파괴하고, 죽이는 일일 뿐입니다.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가 나옵니다.
그가 물에도 들어가고, 불에도 뛰어들죠. 근데 이건 마귀가 이렇게 하는 겁니다.
어떤 청년이 군대에서 학대와 차별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을 했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여기 한 인간이 있습니다.
그 인간을 향해서 사랑과 관심과 배려를 기울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반대로 그 인간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차별하여,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마귀의 뜻이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울기는커녕 그들의 상처를 더욱 후벼파는 잔인한 처사도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소외와 차별은 다 마귀의 뜻입니다.
죄인이 있습니다. 그 죄인이 복음을 믿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죠.
하지만 그 죄인이 끝내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고 죄 속에서 방황하게 하는 것은 마귀와 사탄의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평화 대신 전쟁을 바라고, 정의 대신 부정의가 판을 치고, 진실 대신 거짓이 횡행하기를 바라는 사악한 자들의 사악한 왕국이 있습니다.
이러한 악한 정치 체제는 실재하고 있으며, 지금도 인간과 세계와 문명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서 가장 악한 사탄의 체제는 돈의 질서가 인간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악한 체제에 대항하여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악의 편에 동조하지 말고, 선의 편에 서십시오.
인간을 등급화하고, 인간 그 자체로 존엄한 것이 아니라 돈이나 지위나 권력이나 다른 그 무엇이 있어야만 존엄하다고 평가하는 악마적 인간관을 버리십시오.
오직 인간이라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장애아나, 노숙자나, 중독자나, 노동자나, 그 어떤 인간이라도 존엄하다고 인정하고 사랑하십시오.
=> 사탄과 마귀의 일은 끝내 멸망할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의 척추를 부러뜨리셨습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땅으로 추락하였습니다.
이제 사악한 왕국은 멸망받을 때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축구에서 승리로 끝난 재방송 경기처럼 우리 역사는 이미 하나님나라가 승리하도록 결정된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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