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냄새의 사회학'으로 제목을 정했는데, 검색해 보니 이 제목이 너무 많아서 정치학으로 바꾸었습니다. ㅋ

*주의: 다수의 스포일러 포함

 

# 왜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가?

1930년대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어째서 자본주의가 붕괴되지 않고 계속 발전하고 있는지 고민했다.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내적 모순에 의해 스스로 붕괴될 수밖에 없고, 프롤레타리아 계급 혁명으로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해야 했다. 대공황을 보면서 그의 예언이 실현되는 줄 알았다.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대공항은 마르크스의 예언대로 자본주의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실현의 표징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붕괴되지도 않았고, 낙원도 도래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자본주의는 강고할까? 

봉준호의 전작 <설국열차>는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에 대한 찬가일 것이다. 달리는 기차는 자본주의를, 기차 칸은 계급을, 머리칸은 지배계층을, 꼬리칸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가리킨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위치가 있다”는 윌포드의 주장은 지배계층이 만들어 놓은 임의적 사회질서에 스토이즘적 항구성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다. 꼬리칸의 반란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뜻하며, 열차의 붕괴와 설산에 나타난 북극곰은 신세계의 도래를 의미한다. 마르크스가 살아서 이 영화를 봤다면 분명 공산주의의 도래를 그렸다고 박수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기생충>에서는 이런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느꼈던 절망감, 곧 혁명은 불가능하고, 낙원은 도래하지 않으리라는 깊은 절망감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봉준호는 혁명가도 아니고, 사회주의 프로파간다를 예술로 포장하는 경향 예술가도 아니기에 그의 영화를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평하는 것은 ‘선을 넘는’(?) 해석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이 유용한 것은 <기생충>의 심오한 비극성을 포착하는 데 나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지상 vs. 지하

봉준호는 일찍부터 계층화된 현대 사회를 풍자하는 영화를 만들어 왔다. <설국열차>에서 열차의 머리칸과 코리칸은 계급사회에 대한 고발이다. <설국열차>에서의 수평적인 위계는 <괴물>에서의 수직적인 위계와 같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에서의 수직적 공간 배치, 곧 하수구 아래 틈새, 그 위의 하수구, 그 위의 한강 둔치, 그리고 공중에는 미국에서 투입된 에이전트 옐로우가 자리한 공간적 위계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의 계급적 구조를 보여준다고 말한바 있다. 이러한 수직적인 계층 구조는 그 자체로 비극적이다. <기생충>의 비극성도 여기서 출현한다.

기생충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똑같은 붐다운(boom down) 샷인데 창밖 길거리를 비추던 카메라가 수직으로 하강하여 반지하에 사는 우식을 잡아준다. 이러한 수직적 방향의 이동은 영화 내내 지속된다. 거미줄처럼 얽힌 전기줄 사이로 긴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도 그렇고, 남궁현자가 설계했다는 동익의 집의 수직적 공간 구조도 마찬가지다. 지상층과 지하층의 분할은 부자와 빈자 간의 계급적 위계에 대한 은유다. 

수직적 계층의 맨 밑에는 지하 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이미 봉준호는 지하 공간에 대해서 탐구를 한 적이 있다. 그 영화에서 지하 공간에 사는 경비와 최씨, 귀신이 된 보일러 김씨는 <기생충>에서 지하실에서 귀신처럼 사는 근세와 겹친다. 아마도 세 사람을 합친 캐릭터가 근세일 것이다. <괴물>의 하수구와 그 밑 틈새는 괴물의 은신처이면서 납치된 가련한 희생자가 내던져진 곳이다. 이러한 땅 밑의 사람들은 불가촉천민이 되어 버린 우리 시대의 빈곤 계급의 시각적 은유다.

비는 그 비극성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동익의 집에도 비가 내리고, 기택의 집에도 비가 내린다. 똑같은 비다. 하지만 동익의 집에서는 잔디밭을 촉촉이 적셔주는 단비가 기택의 집에서 홍수가 된다. 계단이건, 육교건 빗물이 콸콸 쏟아져 아래로 아래로 몰리는 바람에 낮은 곳에 사는 가난한 이들의 집들을 집어 삼켜 버린다. 수직으로 쏟아져 내려온 빗물이 최저층으로 몰리는 장면에서 관객은 불행이 유난히도 가난한 자에게 몰린다는 평범한 진리를 보게된다. 비가 와도 가난한 자들이 더 많이 고통 당하고, 지진이 나도 가난한 자들이 더 많이 희생당하고, 병도 더 많이 걸린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공평하게) 내리우심이니라’고 하셨지만 실상은 비마저 가난한 자들에게 더 가혹하다.

수직적 공간의 위계에서 상층을 차지하는 동익네 가족은 문명사에서 존재했던 지배층으로 확대된다. 이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미국을 자주 출현시키는 이유다. <기생충>에서 미국은 ‘미국산,’ ‘일리노이 주립대학,’ ‘영어’ 등으로 언급된다. 사실 봉준호 영화에서 미국은 자주 수직적 계층 구조의 첨단에 위치하고 있다. <괴물>에서 포름알데히드를 무단 방류한 주한 미 8군 용산기지나 시위 진압에 동원된 에이전트 옐로도 그렇고, <옥자>에서 슈퍼 돼지를 개발한 다국적 기업 ‘미란도’도 마찬가지다.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과 북한은 미국에 대한 대립쌍이다. 미국 중심의 질서에서 보자면 이들은 땅 속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숙주와 기생충의 관계인지는 확실치 않다. 먼저 미국과 인디언의 관계를 살펴보자. 처음에는 인디언이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고, 유럽인들이 기생충이었였다. 그러나 지금은 거꾸로다. 미국인이 그 땅의 주인이 되었고, 인디언들은 보호구역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는 기생충 같은 존재다. 인디언 문화는 미국인이 애용하는 상품이 되었다. 부잣집 막내둥이 다송은 인디언 매니아다. 부자니까 가능한 취향이다. 인디언의 천막은 인디언이 아니라 미국인이 만들어서 더 튼튼하다. 그 천막은 지하 창고가 아니라 햇빛 비치는 정원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다송을 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위해서 동익과 기택은 똑같은 인디언 분장을 하고 있다. 이는 인디언이라는 기표의 완전한 의미 상실을 뜻한다. 인디언은 미국 중심의 패권질서 속에 완전히 편입되었기에 그 어떠한 위협의 대상도 되지 못한 채 그저 소비되는 하나의 상품으로서만 존재한다. 인디언은 기생충으로서의 존재적 지위마저 상실한 지하 인간들이다.

인디언에 비하면 북한은 좀 다르다. 미국 중심의 질서에서 보자면 북한도 땅 속 사람들이다. 하지만 북한은 여전히 미국에게 위협적인 존재다. 그래서 인디언 천막은 아마존에서 직구할 수 있지만 북한 핵미사일 모형은 그럴 수 없다. 이처럼 <기생충>의 지상과 지하의 이분법은 전 지구적으로 확대된다.

#착한 부자 vs. 악한 빈자 

사실 부자과 가난한 자 사이의 계층 갈등에 관한 이야기는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다. <레미제라블>, <스크루지 영감 이야기>, <올리버 트위스트>, <흥부전>, 성경 속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빈부 격차와 그로 인한 갈등 이야기는 쌔고 쌨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인류 역사 자체가 계급 갈등의 스토리가 아니겠는가. <기생충>은 그런 뻔한 소재의 식상한 이야기다. 

<기생충>의 참신성은 빈부 계층의 갈등을 도덕적 차원으로 가져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모종의 신화가 있다. 부자는 부도덕적하고, 악하고, 인색하고, 잔인하다. 반대로 가난한 자들은 콩 한쪽도 나눠먹으려고 애를 쓰고, 서로 돌보는 선량한 자들이다. 하지만 <기생충>은 이런 신화를 거부한다. 동익네 가족은 악하지 않다. 도리어 기택네 가족보다 선량하다. 기택과 충숙의 말대로 그들은 구김살이 없다. 사람 말을 쉽게 믿으며 너무도 쉽게 속아 넘어간다. 연가시가 꼽등이를 조정하듯 기택네 가족은 손쉽게 동익네 가족을 숙주조정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기택네 가족은 사기꾼이며, 무도하며, 심지어 잔인하다. 이것은 근세네 부부도 마찬가지다.

동익네 가족의 선량함은 우리 시대의 비극의 깊이를 더욱 심오하게 만든다. 그들은 선량하고, 순진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체육관에 물난리로 이재민들이 모여 쪽잠을 자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막내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가든 파티를 한다. 마치 자신이 죽인 시체 옆에서 태연히 와인을 마시는 사이코패스처럼 말이다. 그러나 동익네가 가든파티를 하는 것은 공감 능력의 결여와 반사회성 인격 장애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도덕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 공간적 격리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동익네 가족이 자기 집 지하에 살고 있는 근세에게 빵 한 조각 나눠주지 않는 것도 그들의 비정함 때문이 아니다. 공간적으로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 집 지하에 근세가 있다는 사실을 모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하실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기생충>은 오늘날 현대 부자들의 잔인성이 그들의 도덕성 때문이 아니라 공간적 격리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적 격리는 현대 사회를 점차 새로운 신분제 사회로 만들어가는 중요한 기제라는 사실도 더불어 폭로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 고급 아파트는 외부차량이나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등록된 차량만 바리케이트를 통과할 수 있고, 비밀번호를 모르는 사람은 아파트 현관에도 들어갈 수도 없다. 고급 빌라촌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그 덕에 아파트는 균질한 성향의 에쓰닉 그룹(ethnic group)으로 종족화 되어 가고 있다. 신림동 빌라에 거주하는 여성은 자신의 집 앞까지 강간 미수범이 들이닥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으나 고급 아파트 종족은 그런 류의 인간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그 덕에 점차 계층별로 공간적 격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여 고급 아파트에 사는 애들은 '빌거'와 '휴거'에 사는 가난한 자들과 마주칠 기회를 점점 상실하고 있다. 그들은 멋지게 조경된 아파트 정원, 넓고 쾌적한 집, 안락한 자가용이 세상의 전부인줄 안다. 버스를 탈 줄도 모르고, 지하철 냄새도 맡아 본 적이 없다. 연교의 심플함은 여기서 오고, 동익의 구김살 없음도 이런 격리로부터 온다. 

한때 카필라국의 왕자 시타르타는 자신이 사는 세상이 기화요초 가득한 카필라 성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그가 사문유출(四門遊出)을 통해 밭가는 농부, 새에게 잡아 먹히는 벌레, 병자, 그리고 늙은이를 목격하고서 번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출가하여 부처에 이르게 되었다.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사유는 가난과 고통, 죽음 등 인간의 실존적 한계과 마주할 때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부유층들은 공간적 격리를 통해서 자신들의 주거 공간을 카필라 성처럼 만들고 있다. 그 덕에 그들은 심플함, 곧 사유의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다. 현대 부자들의 잔인성은 바로 그 심플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공간적 격리로부터 ‘선’이 나타난다. 동익은 계속해서 ‘선을 넘지 말라’고 주문한다. 부자는 도덕적으로 악한 자들이 아니다. 연교의 마음씨는 착하고, 동익도 다정다감하다. 그들은 부리는 사람들에게 갑질을 하지도 않는다. 일정에 없는 출근을 요구할 때에도 수당도 정확히 챙겨줄 줄 아는 쿨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선이 침범당할 때 잔인해진다. 

그가 지키고 싶어하는 ‘선’의 정체는 무엇일까? 언뜻 보면 사적 공간(privacy)처럼 보인다. 기우가 다혜의 일기장에 손을 대는 것은 프라이버시의 침범이고 선을 넘는 것이다. 선이 만일 프라이버시라면 '선을 넘지 말라'는 동익의 주문은 정당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에는 계급성이 함축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동익의 주문에서 각자의 위치를 지키라는 윌포드의 이데올로기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동익과 연교, 그리고 다송이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할 때 알 수 있다. 냄새는 무엇인가? 무 말랭이 냄새? 행주 빤 냄새? 섬유나 린스 냄새? 반지하 냄새? 아니다. 그 냄새는 계급에서 나는 냄새다. 평범한 사람은 맡을 수 없지만 가진 자만이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는 냄새, 지하철을 탄지 너무 오래되어서 지하철 타는 법도 잊어버린 이들만 감지할 수 있는 지하철 타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가 바로 그것이다. 기택네 가족과 근세 부부는 그 냄새를 맡을 수 없다. 하지만 동익네 가족은 다혜만 빼고 모두가 맡을 수 있다. 냄새가 선을 넘어 온다. 자신이 유지하고 있는 계급의 선이 침범당하는 것을 동익은 참을 수 없다. 윤기자가 해고된 이유는 차에서 섹스를 해서가 아니라 선을 넘어와서 섹스를 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계급은 공간적 격리로 고착화되고 있으며, 생리학적 감각 속에 새겨지게 되었다. 동익이 차마 근세를 만질 수 없었던 것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예민한 감각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인류의 탄생을 목도하게 된다. 동익네 가족은 다른 세계에 사는, 별종의 종족이다. 그들은 새로운 생리학적 감각을 가진 자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봉건 사회에서 귀족들이 주장했던 바이다. 귀족과 평민은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 인권 선언이 채택되었고 이러한 주장은 근거 없다고 공인되었다. 하지만 혁명이 있은 지 2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스스로를 신인류라고 여기는 새로운 신분 계층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다. 이 영화는 단순한 빈부 격차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두 인종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이 이 영화의 참신성이다.

#제 2의 혁명

오늘날 부유층은 스스로를 새로운 종족이라고 주장한다. 그로 인해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현대 민주주의의 가치는 위태롭게 되었다. 혈연과 출신의 특권을 가지지 못했던 시민계급은 만민평등을 주장하며 혁명을 일으켰다. 그 혁명의 결과로 등장한 것이 근대 시민사회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부르주와 시민계급 그들 자신에 의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현대 부르주와는 더 이상 시민계급이라 여기지 않으며 새로운 귀족이요, 새로운 인종이라고 주장한다. 하여 지금은 새로운 혁명이 요청되는 시기다.

그러나 혁명은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혁명을 주도해야 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혁명의 주체 세력은 기생충이 되어버렸다. 기택의 가족은 과외 선생인 기우로부터 시작해서, 기정이 미술 선생님으로, 기택이 운전수로, 충숙이 가정부로 동익의 집에 들어가 기생한다. 근세 부부는 한때 문광이 가정부로, 그리고 지하실에 근세가 기생한다. 두 가족은 모두 기생충들이다. 

그들을 기생충으로 만든 것은 지배계층이다. 이는 봉준호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다. 한국에 주둔하는 미 8군이 한강의 괴물을 만들었고, 슈퍼돼지도 다국적 기업이 만들었다. 기택네 가족과 근세 부부도 한때는 사업을 하던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파산하여 기생충이 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에서 패배한 탓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생충, 곧 괴물이 되었다. 다송이 그린 괴물 그림은 사실 기생충으로 살던 근세의 캐리커처다.

기생충은 숙주를 먹고 산다. 따라서 기생충은 숙주의 몰락을 원치 않는다. 하여 기생충이 된 두 가족은 혁명을 원치 않는다. 기생충은 지배체제에 편입된 존재들이다. 기생충의 자리는 비루해 보이지만 안락하다. 근세는 보일러실의 꼽등이처럼 지하 공간에서 말할 수 없는 아늑함을 느낀다. 그는 처음부터 지하실에서 살았던 것처럼 안락함을 느낀다.

근세는 자신에게 이 아늑한 공간을 허락해준 동익님을 향해 ‘리스펙트!’를 외친다. 근세는 자신의 존경심을 모아 동익이 계단을 오를 때 불을 켜준다. 기택도 숙주에게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이는 기생충이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 정신적으로도 의존 상태에 빠져버렸음을 뜻한다. 이미 그들의 영혼은 기생충의 영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뼛속까지 기생충이 되어버린 하층민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공산주의 선언」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무산계급이 유산자 부르주와 계급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단결이다. 흩어지면 죽는다. 하여 단결권은 노동자들에게는 생명과 같다. 반대로 가진 자들의 금언은 Divide and rule! (분리하여 지배하라!)이다. 지배 계층은 어떻게 해서든 피지배계층의 단결을 막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기생충>에 나오는 두 가족은 단결에 관심이 없다. 단결은커녕 하나 뿐인 기생충의 자리를 두고 서로 싸운다. 기택은 근세와 똑같이 대만 카스테라 사업을 하다가 망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서로 동병상련을 느낄 법도 하지만 서로를 향한 혐오는 그칠 줄을 모른다. 기생충 계층은 스스로 분열되고, 스스로 해체되며, 지배층에 아부함으로 스스로 지배받기를 택한다. 이것이 혁명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다. 

#계획하는 기우

기생충 계층은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기우나 기정처럼 계획을 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택이나 근세처럼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민혁의 제안으로 연교를 만날 때까지 기우는 계획이 없었다. 하지만 연교로부터 가정교사로 채용된 후, 이제 그는 모든 가족을 동익의 집에 끌어들일 계획을 세운다. 기정이 일부 계획에 개입하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계획은 기택에 의해 세워진다. 기택은 아들의 신박한 플랜에 감탄한다. “아들아,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영화 속에서 기우는 끝까지 계획을 세우는 자로 나온다. 그의 계획은 놀랍다. 모든 것이 다 맞아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늘 어긋난다. 그는 총 세 번 계획을 세우는데 첫 번째는 자신과 온 가족이 동익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첫 번째 계획은 성공했으나 돌발변수가 발생하는 바람에 좌초되었다. 두 번째 계획은 다솜의 생일 파티 때 산수경석으로 근세를 죽이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또 다시 어긋난다. 그가 근세를 죽이기 위해서 산수경석을 들고 왔지만 뜻하지 않게 산수경석은 그의 손을 빠져나가 버린다. 그리고 근세를 죽이려고 들고 온 산수경석에 도리어 자신이 맞아 죽을 뻔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계획은 돈을 버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지하에 갇혀 있는 그 집을 구입하는 것이다. 

영화는 기우의 ‘계획’의 본질이 망상이라고 폭로한다. 수석의 의미는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수석은 유독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는 기우에게 딱 달라 붙어다닌다. 수석이란 무엇인가? 수석은 상상을 필요로 한다. 작은 돌을 보고 거대한 산봉우리와 호수를 상상하는 것이다. 계획의 본질은 상상이다. 기우는 수석을 보고 무엇을 상상했을까? 민혁은 기우에게 덕담처럼 산수경석이 재물의 운을 가져다준다고 얘기했지만 기우는 진짜로 그 돌이 그런 효험이 있는 신물이라고 상상했다. 부자들이 장식장의 산수경석을 바라보는 것은 운치이고, 멋일지 모른다. 하지만 기우에게 수석은 주물이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지만 주물신앙을 손쉽게 받아들인다. 아마도 그는 그 돌이라도 품고 있으면 언젠가는 행복한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여기서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에게 종교를 허락한 이유를 보게 된다. 종교는 현실의 고통과 아픔을 잊게 해주는 진통제다. 그래서 지배계층이 임의로 형성한 지배체제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이들은 천당을, 어떤 이는 극락을, 어떤 이는 복권 당첨을 상상하며 언젠가 이루어질 미래의 행복을 기다리며 고통스러운 현실을 참아낸다. 

하지만 기우는 여동생의 죽음을 겪으면서 수석과 함께 주물신앙을 버린다. 그는 더 이상 산수경석이 재물과 행운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세 번째 계획을 세운다. 그것은 돈을 벌어서 아버지가 지하에 살고 있는 집을 사겠다는 계획이다. 주물신앙을 버리고, 현실적인 노력을 하겠다는 점에서는 진전이다. 종교에 의존하지도 않고 열심히 돈을 벌겠다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는 이 세 번째 계획의 성패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잔인하게도 이 영화는 이 세 번째 계획도 망상에 불과하다고 폭로한다. 기우는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서 집을 사서 아버지와 감동적인 재회를 하리라고 상상하는데, 그 상상이 너무도 리얼해서 하마터면 관객들도 깜박 속을 뻔 했다. 하지만 그 가슴 벅찬 재회의 장면 다음에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첫 번째 장면의 반복이었다. 그나마 첫 번째 장면은 낮이었다면 마지막 장면은 밤이어서 더 암울하다. 첫 장면과 똑같은 마지막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는 그가 아무리 발버둥친다고 하더라도 그는 절대로 반지하를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암시이다. 

기우의 세 번째 계획에는 아무런 현실성이 없다. 그냥 그는 집을 사버리겠다고 말한다. 그것이 그의 계획의 전부다. 하지만 상상으로 못할 것이 무엇인가. 머리를 다친 후, 그는 뭔가 각성된 의식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경찰 같이 않은 경찰과 의사 같지 않은 의사를 볼 수 있는 통찰력도 생긴 듯 했다. 주물숭배를 포기할 줄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지배체제가 살포한 허위의식을 꿰뚫어볼 수 있는 의식을 조금도 가지지 못했다. 도리어 그는 지배계층에 대한 모방욕구를 내면화했다. 그도 동익처럼 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지배체제는 강고해지고, 혁명의 가능성은 사라진다.

#계획이 없는 기택

반면에 기택은 ‘무계획이 최상의 계획’이라고 주장하는 무계획주의자다.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방에 드러누워 있는 기택에게 아내가 계획이 있느냐고 바가지를 긁지만 기택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충분히 만족스럽다. 모든 것을 달관한 기택은 어떠한 불행이 닥쳐와도 초연하다. 근세가 그 끔찍한 지하 공간에서 살아낼 수 있는 것도 계획을 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택은 근세에게 ‘넌 계획이 없지?’라고 묻는 물음이 코메디가 된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기택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기택은 도를 통달했다. 삶이란 통제할 수도, 계획할 수도 없다는 깨달음 말이다. 마치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어찌할 수 없듯이 기택은 자신의 삶으로 몰아닥치는 사건들을 통제할 수 없음을 잘 안다. 갑자기 문광이 초인종을 누를지, 갑자기 지하실에서 근세를 만나게 될지, 갑자기 비가 와서 캠핑 갔던 사장집 식구들이 들이닥치게 될지, 갑자기 반지하가 물에 잠길지, 갑자기 체육관에서 쪽잠을 자게 될지, 그리고 갑자기 딸이 죽을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기택은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때 대만 카스테라 사업도 했었던 나름 중산층이다. 그러려면 그도 계획을 세웠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는 점차 달관하고, 도를 깨우치게 된 것이다. ‘계획을 세우면 반드시 계획이 틀어진다’는 놀라운 비밀을 터득했다. 그래서 그는 계획을 세우지 않게 되었다. 무계획주의자들은 뛰어난 적응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밟아도 뿌리 뻗는 잔디풀 같은 생명력을 지녔다. 그들은 진작에 체면이고 위신이고 때려치웠다. 그저 제 몸뚱어리 하나 우겨 넣을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살아 남을 수 있다. 

그러나 계획을 세우지 않은 탓에 이들은 즉흥적이다. 지하공간에 영원히 살 것 같은 근세지만 아내의 죽음이 그를 분노하게 했다. 그는 지하를 나와서 햇빛 아래로 몸을 드러낸 뒤 닥치는대로 흉기를 휘둘러댔다. 그의 분노에는 계획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죽고 말았다. 기택도 마찬가지다. 그도 동익이 냄새 때문에 코를 막는 것을 보고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해서 동익을 찌른다. 계획에 없던 일이다. 

근세와 기택의 분노는 가난한 자들에게 남은 마지막 무기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 무기는 혁명의 도구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사건사고로 허비되었다. 무계획적 분노의 폭발로는 강고한 지배체계를 바꾸지 못한다. 그러한 즉흥적 분노로는 머리칸을 뒤엎는 꼬리칸의 혁명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무계획의 한계다. 봉준호는 원쑤의 가슴팍에 핵미사일을 쏘아 박겠노라 호언하는 북한 정권을 향해서 계획 없이 흥분하지 말라고 점잖게 충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계획을 세우는 자도, 계획이 없는 자도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모든 변화 가능성이 철저히 차단된 세계, 일체의 혁명도 불가능해져버린 사회, 이것이 <기생충>이 보여주는 지금 우리 시대의 비극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기생충>의 비극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으며, 절망감은 그 크기를 측량할 수 없을만큼 크다. 그리고 이것이 혁명은 왜 일어나지 않으며, 어째서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가 번성하는지에 대한 봉준호식 답변이다.

#마지막 희망

절망이라는 유령이 이 영화에 떠돌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이 영화에서 유일한 한 가지 희망의 빛줄기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다음 아닌 냄새다. 이 영화의 가장 심오한 아이러니 중 하나는 기택이 동익을 살해했을 때 드러난다. 왜 기택은 딸을 죽인 근세가 아니라 동익을 찔렀을까? 그것은 냄새 때문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냄새는 다름 아닌 근세의 냄새였다는 사실이다. 동익이 차열쇠를 덮고 있는 근세를 밀어젖힐 때, 근세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동익의 코를 찔렀다. 이에 동익이 코를 틀어막는데, 이를 본 기택이 벼락같이 달려들어 동익의 가슴팍에 칼을 꽂은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지금 기택은 딸을 죽인 원수를 위해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동익이 근세에게서 나는 냄새 때문에 코를 막을 때, 그 순간 기택은 근세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서로 같은 사업을 하다가 망했다는 사실에도 동병상련을 느끼지 못했던 기택은 동익이 근세를 향해 보인 경멸을 자신을 향한 경멸로 느꼈던 것이다. 바로 이 순간 기택은 기생충들끼리의 투쟁을 멈추고 기생충들 간의 연대를 발휘한다. 물론 이 일이 있기 전에도 어려운 사람들끼리 서로 잘 해보자는 제안이 있었고, 충숙과 기정은 음식을 싸다가 근세네 식구들에게 먹이려고도 했다. 연대의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성사되지 못했다. 유일하게 실행된 연대는 기택이 동익을 칼로 찌른 그때 일어났다.

냄새는 기택과 근세를 연대하게 했다. 다송이 말한 대로 냄새는 기택에게서도 나고, 기정에게서도 나고, 충숙에게서도 난다. 모두 다 똑같은 냄새를 풍긴다. 동익은 그 냄새를 지하철을 타는 사람 일반에게서 나는 냄새라고 했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냄새는 계급의 냄새다. 아무리 졸업장을 위조하고, 또 일리노이 주립대 졸업생 행세를 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그 냄새다. 냄새는 기생충으로 하여금 숙주를 공격하게 한다. 저항과 혁명의 시발점이다. 냄새가 연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연대는 유일하게 지배체제를 흔들 수 있는 무기다. 기택이 근세와 동일한 계급이며, 연대해야 하는 이웃이라는 각성은 냄새로 이루어졌다. 그와 내가 하나라는 인식, 그것이 이 영화가 남겨놓은 마지막 남은 희망이 아닐까. 

이 해석이 옳다면, 나에게 남겨진 물음은 이것이다. 냄새가 지하 인간들을 하나로 연대하게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공동체적 특수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연대가 계급적 연대를 넘어 모든 인간의 연대로 확장될 수는 없는 것일까?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지하철 냄새에 덜 민감했던 다혜는 연세대에 다니는 기우가 아니라 한 사람 기우를 사랑했던 것이 아닐까? 그랬다면 다혜처럼 기택네 가족과 근세 부부를 넘어서까지 동익네 가족까지 모두에게서 나는 냄새, 곧 ‘사람 냄새’를 정녕 함께 맡을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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