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로마서 7장 14- 25절
#기독교강요:
-제 2권 4장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속에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제 2권 5장 자유의지를 변호할 때 흔히 제기되는 반론들을 반박함
우리는 오늘 오래된 신학적 논쟁 중 하나에 대해서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주권이 완전하다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어야 하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도 아니면 50대 50으로 조화를 이룬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인간은 본성상 부패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원죄라고 말한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원죄 때문에 인간은 본성상 부패하여 지은 죄는 내 책임이 아니라 원죄의 책임이 아닐까요?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본성을 타고 났는데, 왜 인간 책임일까요?
내가 자유의지로 죄를 지어야 나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 합당한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원죄 때문에 죄를 지었다면 나에게 자유의지는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은 구원론에도 그대로 적용되지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구원받는다면 나에게 자유의지는 아직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원죄에 대해서나 구원에 대해서 묵상할 때마다, 우리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져듭니다.
어쩌면 자유의지는 환상이고 우리는 그저 꼭둑각시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상상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결론을 내리는 것 같습니다.
1) 죄는 원죄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고 말합니다.
2) 그러나 구원은 내 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곧 은총 덕이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는 모든 악은 인간 탓이고, 모든 선은 하나님 덕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이것은 ‘잘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고 하는 뻔뻔스러운 논리와 비슷한 논리가 아닐까요?
정통교리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대한 자유의지론자들의 거센 공격이 있었습니다.
펠라기우스와 같은 신학자는 결국 모든 것이 다 인간 책임이라고 했습니다.
죄도 인간이 지은 것이고, 구원도 인간 하기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펠라기우스의 논리는 계몽주의자들의 논리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들은 신을 인정하지 않죠.
그래서 잘못을 행했다면 그것은 인간 책임이고,
그 잘못을 해결할 수 있는 책임도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인간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기독교의 논리는 인간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억지 논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와 같은 이들은 기독교를 노예의 도덕을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겸손이니, 근면이니, 순종이니... 이런 것들은 우주의 중심에 자리한 주체적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덕목이라는 것이죠.
펠라기우스의 제자들 중에서 다소 중도적인 입장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반(semi)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라고 했는데요,
그들은 구원에 대해서 인간이 50, 하나님이 50 이렇게 서로 협력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신인협력설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주장도 어찌 보면 상당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한편, 뻔뻔스러운 악인들의 입장은 정통 교리와는 정반대이죠.
그들은 일이 잘 안 풀리면 다 하나님 때문이라고 변명합니다.
부모님탓을 하거나, 주변 사람들 탓을 하거나, 환경 탓을 하거나, 국가나 정부 탓도 합니다.
그런데 일이 좀 잘 풀리면 그건 다 자기가 잘나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입장들은 악은 인간탓, 선은 하나님덕이라는 정통 교리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통교리의 주장은 인간을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는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은총)의 관계의 문제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난제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넘어가도록 합시다.
1. 자유의지는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칼뱅주의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을 듣고, 칼뱅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이 인간의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을 말할 때,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자유, 그리하여 구원에 이를 만한 선을 행할 자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자유의지와 자유를 구분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밥도 먹고 합니다.
히틀러가 행한 끔찍한 만행과 학살은 바로 히틀러 그 본인의 자유의지로 행한 것입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행한 죄와 악은 다른 누군가의 의지가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한 나의 죄와 악입니다.
이처럼
정통교리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2. 자유의지가 있다면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을 행할 수 있는가?
No!!! 없습니다!
이것이 정통 교리의 주장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유의지가 죄를 행할 때에만 기능을 하고 선을 행하는 데에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어떻게 이런 논리가 가능할까요?
1) 우리는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할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아무런 선행을 베풀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선은 (앞으로도 계속 그러겠지만) 구원 얻기에 합당한 선을 말합니다.
단순한 윤리적 선이 아니라 구원 얻기에 합당한 선인데,
여기에는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선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21]
2) 두 번째로, 인간이 자유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할 수 없는 이유는 무지 때문입니다.
인간은 지각이 없어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의미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마피아 보스의 아들로 자란 아이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인줄 압니다.
자기가 먹는 맛있는 밥이 죄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고 빼앗은 밥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가 정의로운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지각이 없으며, 무지하기 때문에 설령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구원얻을 만한)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4]
사실 대부분의 인간은 무지함으로 악에 공모합니다.
악에 공모하지 않고 선을 행하며, 정의로운 행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만 온전히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지식으로는 부분적으로, 파편적으로만 얻을 수 있지요.
3) 마음이 부패했기 때문에 자유의지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
성경은 인간의 마음의 중심의 부패성에 주목합니다.
마음의 부패가 드러날 수 있는 상황만 주어진다면 인간은 반드시 악을 행하고야 말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속의 부패성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제어되고,
사회적 규범이나 법적 처벌 등 여러 이유로 마음 속의 악이 어느 정도 절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제거된 상태라면 어떨까요?
군대 갔더니 이상한 사람들, 악한 사람들, 폭력적인 사람들이 참 많더라구요.
사회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을 군대에서는, 특히 상사가 부하에게 서슴없이 하더라구요.
만일 어떤 인간에게 마음 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이 주어졌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가 권력으로 뭔가를 할 때, 이를 제어할 수 있는 통제장치가 전혀 없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런 사람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끝내는 악으로 기울게 되리라는 것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지 않나요?
왜 그럴까요?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악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악으로 편향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자유의지 자체가 망가져 있는 것입니다.
->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로운 의지가 아니다. 왜냐?
악을 행할 때에만 ‘자유로운’ 의지이고, 선을 행할 때에는 ‘자유로운’ 의지가 아니다.
-> 악의 책임은 자유의지로 악을 행한 인간 자신에게...
선의 공로는 그에게 없다!
선을 행할 수 없다. 만일 그가 선을 행했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다.
결국 인간은 자유의지로 악을 행하지만, 자유의지로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현실 속에서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알콜 중독자가 술을 마시는 것은 '중독'입니까? 그의 '자유의지'입니까?
알콜 중독자는 그의 자유의지로 술을 마십니다.
그런데 알콜 중독자가 그의 자유의지로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나요?
없습니다.
결국 알콜 중독자에게 자유의지란 술을 마시는(악) 자유만 있을 뿐 술을 마시지 않을(선)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유의지가 망가져 있을 뿐입니다.
중독 상황 뿐만 아닙니다.
예를 들어, 부모의 이혼으로 비행청소년이 된 학생을 생각해 봅시다.
그에게 온전한 판단과 건강한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 그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비행을 저지른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의 불행한 환경이 죄를 저질렀나요?
아닙니다. 결국 그 학생 자신이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때문에 그 개인에게만 전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치료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만일 그 학생이 치유되어 건강한 사회인이 되기를 정말로 원한다면, 그 학생은 자신이 그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그 학생은 환경탓을 할 수 있고, 부모탓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틀린 말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렇게 계혹 환경탓, 부모탓을 하고 앉아 있으면 그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부모 때문에, 환경 때문에 악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자유의지로 잘못을 저질렀다고 인정해야만, 그에게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통교리의 가르침이에요.
인간은 원죄로 인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인간은 100이면 100, 죄를 짓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을 때, 결국 그 죄는 그 개인의 자유의지로 짓는 것입니다.
원죄가 그의 팔과 발과 몸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가 그 자신의 몸을 활용해서, 그가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이에요.
자신의 자의로, 자유의지로 그러나 필연적으로 죄를 짓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정통교리는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정통교리는 자유의지의 패러독스를 매우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실로 심오하고, 신비하며, 역설적입니다.
알콜 중독자의 예를 다시 들겠습니다.
알콜 중독 치료 프로그램인 AA 치유 12단계에 기초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가장 먼저 알콜 중독이 치료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술을 마실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정하기 위해서는 자유의지로만 가능합니다.
부인이나 자녀나 부모가 아무리 설득해도 안 됩니다.
오직 자신의 자의로 자신이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치료가 시작됩니다.
자신에게 술을 마시지 않을 자유의지가 부분적으로 없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없다고 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지의 패러독스를 보게 됩니다.
2) 그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여기서 '다른 누군가'는 누군지 모릅니다.
다만, 그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존재, 그를 알콜 중독에서 치료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가정하는 것입니다.
그의 존재는 하나님이 될 수도 있고, 알라가 될 수도 있고, 부처님이 될 수도 있고, 돌아가신 조상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라도 상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를 믿는 것, 이것이 치유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물론 이 역시 자신의 자유의지로 인정하는 것이죠.
핵심은 이것입니다.
알콜 중독 치료는 내 안에서(ab intra)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치료는 오직 밖에서(ab extra) 온다는 것입니다.
알콜 중독은 '내가 할 수 있어'라고 하면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없어'라고 하면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없어'라고 고백함으로써 알콜 중독이 치료되었다고 하면 그 치료는 누가 한 걸까요?
여기에 자유의지의 심오한 패러독스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패러독스 안에서만 자유의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패러독스를 넘어서 실제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믿는 것이죠.
이러한 자유의지 패러독스를 정통교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은 내가 내 자유의지로 행한 것이고,
-선은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3. 고로 우리는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은 '나 때문' 곧 '나의 자유의지' 때문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원죄 탓을 해서도 안 되고, 아담 탓을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악의 창조자라고 비난해서도 안 되고, 사탄 핑계를 대서도 안 됩니다.
부모님 탓, 환경 탓을 해서도 안 됩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이죠.
또한 ‘나는 내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항복 선언을 해야 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는 선언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치유의 첫 걸음이고, 구원의 시발점이 됩니다.
자유의지 패러독스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남 탓을 할 때, 우리는 '나'라는 감옥 안에서 갇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죄를 반복해서 짓게 됩니다.
하지만 항복선언을 할 때,
우리는 나 자신과 직면하게 됩니다.
나의 무능력, 나의 죄악성, 나의 책임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자아의 감옥을 빠져나올 가능성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구원의 출입문을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자유의지 패러독스라는 관점에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단순히 자유의지 패러독스로만 설명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이것은 내 의지의 메커니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니까요.
단순히 자유의지 패러독스 때문에 우리가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구요,
우리가 항복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 구원의 밧줄을 붙잡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전적 무능력을 인정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이습니다.
이 구원은 어디서 올까요?
우리 안에서(ab intra) 올까요? 아닙니다. 우리 밖에서(ab extra) 옵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은총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인협동이죠. 내가 반 정도 노력하면 나머지 반은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것이 은총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총이 역사합니다. 그리고 그 은총이 결정적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우리의 의지를 움직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할 힘을 공급해줍니다. 그래서 죄에서도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본문에서 바울은 꼼짝달싹 못하는 상태를 기가 막히게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거에요.
자기 안에서는 그 어떤 구원의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곧 이어 말하기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곧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약1:17]
먼저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구원을 시작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5. 전적으로 구원의 공로가 은총에 달려있다면, 구원 받은 자의 공로는 있을까요?
없죠.
있다면 기독교의 구원론은 공로 구원이 될 것이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의 여정이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견인이 그 여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붙들어주셔서
우리가 끝내 구원의 종착지에 도착했습니다.
그 모든 공은 누구의 것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공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신실한 종의 비유를 기억하시지요.
이 종은 들에서 힘겹게 밭을 갈고, 양도 쳤습니다.
농업과 목축업을 같이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집에 오자마자 주인의 식사 수발을 듭니다.
밥을 하고, 식탁에 식사를 차리고, 주인에게 진지 잡수시라고 청합니다.
주인은 하루 종일 놀다가 종이 식사하라고 해서 식탁에 앉습니다.
종은 냅킨을 들고 식탁 옆에 서 있습니다.
주인이 반찬이 모자라다고 하면 반찬도 가져다 드리고, 목마르다고 하면 물도 가져다 드립니다.
식사를 다하면 냅킨을 드립니다.
이렇게 열심히 수고를 한 종에게 주인이,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라고 말합니까? 안 하죠.
종이 주인에게, '이보시오. 주인 양반, 내가 하루 종일 이렇게 고생하는게 보이지도 않소?' 이렇게 따집니까?
아니죠. 주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17:10]입니다.
종에게 공을 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 번 반전이 일어납니다.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를 보십시오.
주인이 종에게 뭐라고 합니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합니다.
이 칭찬은 종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칭찬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인은 종에게 칭찬합니다.
우리는 그 은총에 기대서 우리가 주님께 상받을 것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고전3:8]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골3:24] 여러분은 주님께 유산을 상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인데요, 왜 우리가 상을 받습니까?
이 상이 또한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공인것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는 공로를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공은 우리의 공이 아닙니다.
은총이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까?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비록 무가치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인정받고, 구속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은총과 공로의 관계가 복합적이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공로는 적대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인간의 공로는 구속받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단선적이지 않고, 일차원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은총)을 단선적이고 일차원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마치 양립불가능한것처럼 간주합니다.
그러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은총)은 모순관계도 아니고 대립관계도 아닙니다.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의 대립은 합리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50:50으로 상호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자유의지 100%, 하나님의 은총 100%를 말합니다.
이 둘의 관계는 다차원적인 관계로 서로 얽혀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서 이해할 때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욥의 고난의 원인은, 하나님 때문일까요? 사탄 때문일까요? 강도 때문일까요??
셋 중 하나만 원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단선적이고, 일차원적인 이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셋 모두 100%의 원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1) 하나님은 욥을 단련하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2) 사탄은 욥을 파멸시키기 위해 그에게 고난을 가했습니다.
3) 강도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욥의 가족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이 셋이 3:3:3의 비율로 원인을 나눠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셋이 모두 100%의 원인이 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면서, 전적으로 사탄의 책략이면서, 전적으로 인간의 범죄입니다.
이 세 가지의 원인의 관계는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바른 자세는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 덕이지만, 모든 악한 것은 나의 죄 탓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신뢰하면서, 동시에 전심으로 내 노력을 다 기울여 순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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