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설교

[21세기 기독교 강요03]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길

Caleb Shin 2019. 5. 10. 12:21

#본문: 누가복음 5장 1-9절
#기독교 강요:
-제 1권 5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주 창조와 그 지속적인 통치에서 빛을 발한다.'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도 인격적으로 만난다니요? 
어떻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revealation)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질문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계시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니요. 계시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다니요. 이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1. 오늘 본문 1-2절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밤새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고자 했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밤 새 보셨죠. 얼마나 피곤합니까?
베드로와 동료들은 지금 그런 상태입니다. 그들은 밤을 새서 피곤합니다. 
거기다 고기를 한 마디로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 피곤이 얼마나 더 심하겠습니까?
그들은 좌절했고, 실망했습니다. 
집에 가서 마누라에게 긁힐 바가지가 두려워 한숨이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내일 출어를 위해서 집에 가지 않고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어야 했습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빈 그물을 씻는 심정이 이해가 되십니까? ‘내가 지금 뭘하고 있지?’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읽었던 어느 심리학 보고서가 생각이 납니다. 
교도관이 수감자들에게 마당에 사람이 들어갈 만한 깊이의 구덩이를 파라고 했다고 합니다.
반 나절동안 열심히 그들은 구덩이를 팠습니다. 
그랬더니 교도관이 그 구덩이를 다시 흙으로 메우라고 했다고 합니다.
열심히 메웠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또 파라고 했답니다. 
그렇게 몇 번을 했더니 수감자들이 정신적으로 이상해지게 되었다는 글인데, 출처가 어딘지 가물가물합니다. 


어쩌면 시몬과 그 동료들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무의미한 일을 하는 것 같은 극도의 허무감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핵심 감정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고기를 못 잡을 것이고, 사업도 실패할 것이고, 하는 일마다 잘 안 될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고기를 잡을 수도 있고, 사업에 성공할 수도 있고, 하는 일이 대박이 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궁극적인 목적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우리 인간의 궁극적은 목적지요, 지향이거든요.
해서 열심히 삽질을 하지만 왜 해야 하는지 모른 채 그냥 열심히 삽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이들 마음 깊은 곳에는 허무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혼란스럽습니다.
‘인간은 전쟁을 견딜 수는 있어도 혼란은 견딜 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혼란은 정말로 견디기 힘든 법입니다.


혼란에 빠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아무 것이나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 길이 옳겠거니 생각하고, 그것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방향이라고 믿어버리는 겁니다.
성경은 이것을 미신이요, 우상 숭배라고 말합니다.
고대인들은 거대한 바위, 괴상하게 생긴 나무, 밝게 빛나는 태양, 높고 푸른 하늘, 맑은 달, 밤하늘에 총총 박힌 별들, 사자, 곰, 뱀, 소.. 이런 것을 삶의 목적이요, 방향이라고 믿었어요.
현대인들은 좀 다르긴 합니다만, 돈, 성공, 학위, 명성, 쾌락, 행복감... 이런 것들에 헌신합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허무와 혼란을 견디지 못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가짜 하나님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잠시 혼란과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는 더 멀어집니다.
무지가 그들을 덮고, 죄가 그들의 영혼을 갉아먹습니다.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 하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어서,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 발 달린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장 칼뱅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한 질병에 걸려 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유식한 자나 어리석은 자나 ..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모든 사역들을 분명히 보고도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온갖 축복을 그저 '운이 좋아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행지에서 목격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능력을 보고도 그저 경치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면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는 대신에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그들이 계속 범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포기하시고 냅둬버리면, 그들은 자신의 죄악된 삶의 방식이 크게 성공한 줄 알고 득의양양해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에게 찾아온 행운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하는 것입니다.
왜냐? 차라리 베드로처럼 실패해야 자신이 붙잡고 있는 헛된 미신과 우상의 한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속되고 반복되는 성공은 도리어 그를 멸망으로 이끌어 가고야 맙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도 계속 성공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해서는 안될 일들을 하게, 타락한 마음 자리에 내버려 두셨습니다."[롬1:28]
하나님의 유기는 가장 큰 형벌입니다.
때문에 베드로와 그 동료들의 좌절은 도리어 큰 행운입니다. 
그들은 이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고, 그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이 형통할 때 우리는 돌아봐야 합니다. 
혹 우리가 하나님 없이도 삶이 형통한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는 큰 재앙입니다.
우리의 삶이 고통과 질곡의 길을 지나고 있다면 우리는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때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빈 그물을 씻고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우리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실 것이니 말입니다.

2. 우리가 빈 그물을 씻고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 곁에 다가오시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특별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관계적인 지식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지식에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대상 몰입형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관계적 지식'입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가 왕관과 같이 형태가 복잡한 물체의 부피를 측정하는 법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너무도 기뻐서 ‘유레카, 알았다’를 외치면서 깨댕이를 홀딱 벗고서 길거리를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아르키메데스가 깨달은 지식은 지식의 대상에 몰입해서 자신이 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도 모르는 지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상 몰입형 지식입니다.
수학문제를 푸는 법, 과학 법칙, 기술적 지식, 심오한 철학 원리 등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지식이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길을 가다가 하품을 크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제 앞쪽에서 걸어오던 여성과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저는 그때 그 여성을 보면서 동시에 제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여성과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는 무심코 하품을 하고 그 길을 지나갔겠지요.
하지만 그 여성과 눈이 마주치자 제가 하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남을 보면서 자신도 보는 것, 이것이 바로 관계적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 둘 중 어떤 종류의 지식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관계적 지식입니다.
대상 몰입형 지식은 사변적 지식이죠.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마치 관찰자가 제 3의 입장에서 건조하게 사태를 관망하면서 얻는 지식입니다.
이때 관찰자는 상황 속에 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객관성과 중립성을 잃게 되기 때문에 그 지식을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사변적 지식으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모두에 저는 여러분들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신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변적 지식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과 관련된 여러 주변적인 지식을 주워 모을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들은 풍월만 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은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본문을 좀 봅시다.
빈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와 그 일행들에게 예수님은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밤새 애를 썼지만 아무 것도 못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고, 베드로의 직업은 어부입니다.
그런데 지금 목수가 어부에게 고기잡이에 대해서 훈수를 두고 있습니다.
거기다 깊은 데에 그물을 내리는 것은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완전히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고 계신 것이지요. 
더구나 피곤한 중에 기껏 그물을 다 씻어놓았는데, 그 그물을 내려라???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가요? 참 갑갑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베드로는 목수와 고기 잡는 방법에 대해서 논쟁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사변적 지식의 차원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랬다면 그는 절대로 고기도 잡을 수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순종’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중요한 방법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책으로? 강의로? 유튜브로? 혹은 깊은 사색으로???
아닙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최선의 길은 ‘순종’입니다. 
즉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상황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순종할지, 말지 실존적인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고서는 사변적 지식에 머무르지만, 순종할 때 그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가 있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에요.
이성 교제할 때를 생각해 봅시다. 저 자매가 마음에 듭니다. 사귈까 말까? 이렇게 막 고민하고 저울질할 때가 있잖아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자매를 사귀기로 결단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에 결단을 하는 순간부터 상대방이 달리 보이지 않습니까?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단은 새로운 차원으로 우리의 신앙을 이끕니다.

새파란 목수 청년의 같잖은 훈수을 듣고 베드로는 순종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낚게 됩니다. 다른 동료들도 도와달라고 부탁해서 겨우겨우 두 배에 가득 고기를 채웁니다.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결단과 함께 일어난 일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대단히 흥미로운 베드로의 반응을 보게 됩니다.
갑자기 베드로는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는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의 변화를 보게 됩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베드로가 순종하자 그는 새로운 차원으로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전에는 선생님이었으나 이제는 주님으로 알게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주님 앞에 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은 그냥 고기 잡는 법만 가르쳐주셨잖아요.
근데 베드로는 어떻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된 걸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식하자마다 그 주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겁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고, 동시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앎, 
이것이 관계적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제대로 인식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온갖 변명과 합리화, 정당화.. 이런 것들로 우리 자신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무지와 죄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막고 있어요.
이 사실을 깨닫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이것은 정말 천재적인 통찰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이 없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식이에요.
하지만 우리의 죄와 무지가 깨달아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 수 있구요,
거꾸로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와 무지를 깨닫게 됩니다.

3.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합니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알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직감적으로 깨닫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던 것입니다.

칼뱅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주의 깊게 탐색할 분이 아니라 경배받으실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 나오시는 이유, 예배 드리시는 이유, 설교를 들으시는 이유를 잘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하나님에 대한 들은 풍월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예배하기 위해서에요. 그 분 앞에 무릎 꿇기 위해서에요.
우리의 죄를 깨닫고, 우리의 완고함과 무지를 통렬히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에요.
그리고 하나님만을 예배하기 위해서, 그 분을 찬양하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종국적으로 그 분께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의 참된 의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사람, 하나님에 대한 들은 풍월을 늘리려는 사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저도 오랫동안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대체 그게 뭐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다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이 객관적인 말씀이 아니라 나를 향하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 겁니다.
제가 아직도 생각만 하면 전율이 일어납니다.
제가 20대 때, 영화를 공부하고 싶어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영화사를 차리려던 신모씨를 알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창립멤버를 모집 중이었습니다.
그는 제가 찍은 사진을 보더니 같이 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 제안을 받고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신앙이 깊지는 않았지만 기도를 하게 되더라구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하나님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성경공부에 들어가서 거기서 예레미야 45장 5절 말씀을 읽게 됩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렘45:5]

이 말씀이 제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쳤습니다.
제 진로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구하고 있는 저에게 그 말씀은 더 이상 객관적인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그 말씀은 예레미야의 필경사인 바룩에게 주신 말씀이었으나 그 순간 그 말씀은 인생의 길을 정하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는 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제 앞에 서 계셨고, 저는 하나님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를 하지 말라는 말씀 때문이 아니고, 제 모든 상황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느낌 때문에 눈 앞에 캄캄해지고, 식은 땀이 나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당연이 관뒀죠. 그때 그분이 무척 서운해하더라구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바로 그 순간 저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이더라구요.  (스펄전 목사님도 바로 이 말씀을 받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적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또 나중에 알고 보니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더군요.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13장 13절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존 웨슬리도 올더스게이트가에서 모라비안 교인들의 집회 도중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다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뒤 대부흥운동을 이끕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회심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주일 예배를 드리러 가다가 눈이 너무 와서 근처의 작은 감리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폭설 때문에 그 그교회 성도들도 많이 빠졌고, 그래서 열 너댓 명만 예배에 참석했더랬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도 눈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 나이 많은 집사님이 대신 설교했습니다.
준비가 덜 된 탓에 본문 말씀으로 이사야 45장 22절, “나를 바라보라(앙망하라) 그리하면 모든 땅끝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를 읽고는 한참을 중언부언했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시오.(look unto God) 안 그러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설교의 내용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노인네는 젊은 스펄전을 보고는 ‘이 보시오, 젊은이! 당신 참 비참해 보이는구먼. 당신도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으면 그 비참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오. 하나님을 앙망하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오.’
그런데 바로 그 유치하고 단순한 설교가 스펄전의 심장을 관통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일어나는 모습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양심을 찌를 때, 여러분의 영혼을 붙들고 흔들 때,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이 여러분 앞에 다가오시는 순간이고,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때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하셔야 합니다.
그 순종과 함께 여러분은 하나님과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관계 속으로 들어가시게 됩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삶으로, 능력으로 여러분의 삶을 주장하시게 되요.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충분히 알고 난 뒤에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그렇게 하려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더욱 깊은 차원으로 하나님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