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설교

[21세기 기독교강요10]너 자신을 알라.

Caleb Shin 2019. 5. 27. 09:49

 

#본문: 로마서 5장 12-21절
#기독교강요:
-제 2권 1장 아담의 타락과 반역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가 저주를 받앗고 그 원시 상태로부터 이탈되어 부패했다.: 원죄론
-제 2권 2장 인간은 지금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비참한 노예 상태로 전락되었다.
-제 2권 3장 인간의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오직 저주받은 것들 뿐이다.

바울의 로마서 5장은 원죄에 대한 말씀 중에서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계몽된 현대인이 가장 싫어하는 기독교 교리가 있다면 그 중 하나는 바로 이 원죄론일 것입니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지성과 능력을 낙관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적 비관주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원죄를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다윈의 「종의 기원」은 원죄론을 부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진화론은 인류의 기원을 창세기 3장이 아니라 화석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은 부정되고, 그러자니 원죄도 부정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죄 사상은 기독교 사상의 기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구속의 은총에 있어서 기본 전제나 마찬가지입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원죄가 없으면 구원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칼뱅의 기독교 강요 2권, 「예수 그리스도」의 첫 부분이 원죄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1. 기독교 원죄 사상은 무엇인가?
원죄는 기독교 사상의 독특성입니다.
유대교는 똑같은 구약성서를 쓰지만 원죄사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죄는 인간의 여러 죄들 중 하나고, 순서상 첫 번째 죄일 뿐이지 그것이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원죄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슬람교는 아예 창세기 3장을 빼버렸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는 먹지만 그것이 정확히 선악과는 아니고, 건망증 때문에 먹었다고 말합니다.
순자의 경우 성악설을 주장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원죄설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예'를 강조하고, 엄한 법률로 인간 행동을 규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원죄설과 비교해보면 여전히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엄한 법률로 다스리면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례들과 비교해 보면 기독교 원죄설은 매우 독특합니다.
1) “실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고,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시51:5]
다윗의 시편 51편을 보면 태어나기도 전부터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2)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12절]“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시원에서부터 죄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렘17:9]“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
또 [마23:27-28]“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이 말씀은 인간의 행위 이전에 마음 상태가 이미 더럽고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법은 마음을 규제하지 못합니다. 다만 행동만을 규제하지요.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마음을 규제(?)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살펴보니 죄로 쩌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원죄론을 종합해 보면 인간의 근원적 죄성과 악마성에 대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고발하는 사상은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 고발하고 있는데요,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 사람들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수군거리는 자요, 중상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불손한 자요, 오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꾸미는 모략꾼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신의가 없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입니다.”
여기서도 살펴보면 대부분의 죄가 마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의 개념은 매우 근본적이고, 심원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비관주의를 우리는 다른 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영지주의는 육체를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힌두교와 불교는 자신과 타자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허상이며, 여기서부터 오류에 빠져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관주의 내지는 허무주의는 기독교 원죄사상과 다릅니다.

기독교의 원죄 사상의 특징은
첫째로, 단순한 비관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의 결과가 초래한 광범위하고 심오한 비극이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의 선택의 결과로서의 죄가 인간 개인의 실존적 속박을 초래하고, 소외를 초래하고, 관계를 파괴하며, 죽음이 들어오고, 생태계 전반에 왜곡이 생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인간 실존의 악마성은 개인의 결단 이전으로 소급된다는 점입니다.
'아담’의 죄는 죄의 시간적 시원성을 의미하고, 죄의 깊이의 원초성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원죄에서 중요한 것은 아담의 죄가 아닙니다. 결국 나의 행동이 아담과 다를 바 없는 죄이며 반역이라는 것입니다.
즉 원죄론은 아담의 죄를 기소하는 교리가 아니라, 내 행동의 의미를 밝히는 교리인 것입니다.
넷째로, 이 결과를 역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 안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의 가능성은 없고, 오직 악의 가능성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이러한 원죄는 정말로 믿을만한 교리일까요?
여기서 원죄의 현실성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계몽주의는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에 기초해 있습니다. 그래서 원죄를 부정하고 역사와 인간성, 문명, 사회가 점차 진보한다는 진보사상을 신봉했습니다.
계몽주의자들은 델포이 신전의 신탁 ‘너 자신을 알라.’를 상당히 좋아하는데요, 왜냐하면 이 말은 ‘너의 위대함을 알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로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 자신을 아시오.'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가졌던 계몽주의는 실패했습니다.
1) 19세기 계몽주의, 진보사상이 극에 달했을 때, 그 19세기 말을 '벨라 에포케' 즉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야흐로 20세기에는 완전히 발전된 문명, 진보된 인간성, 천년왕국이 이 지상에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20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세계 대전이 두 번이나 벌어졌습니다.
유물론자들은 내세의 지옥이라는 말을 없애버렸는데요, 사실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왜냐햐면 현세에 hell gate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세계 대전이라는 hell gate을 닫기 위해 핵폭탄이라는 더 큰 hell gate을 열었다는 것이 세계대전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세계 곳곳의 인종청소 등이 20세기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2001년 21세기가 시작된 원년에,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가 비행기에 의해 붕괴되는 영화같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911은 21세기는 테러의 시대가 될 것임을 함축하는 사건입니다.
저는 원죄를 부정하는 계몽주의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인류의 도덕성의 진보를 신뢰한다는 진보주의자들이여, 
인간의 가능성을 낙관하는 계몽주의자들이여,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끔찍한 악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오?

2) 그런데 현대적 악은 특수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베트남전의 민간인 학살이나 아우슈비츠의 학살과 같은 사건들은 과거의 악들과는 매우 다른 악입니다.
이런 끔찍한 현대적 만행의 특징은 책임자를 콕 찝어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공모되고, 연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아우슈비츠의 악은 히틀러의 책임이라고 합니다만 광대한 범위에서 벌어진 엄청나게 다양한 활동들이 조합되어 일어난 그 모든 사건을 히틀러에게만 돌리는 것은 무리입니다.
아우슈비츠 학살의 책임자로 아돌프 아히히만이 지목되었습니다.
그가 남미에서 체포되어 예루살렘 법정에 세워저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재판을 받았는데요,
그는 유대인을 실은 기차에 독가스실을 설치할 것을 발명한 발명가이가도 했구요,
한 가족을 따뜻하게 돌보고 사랑하는 가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이러헥 변론했습니다.
“이것 보시오. 나는 학살을 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이오.”
그는 우리에게 '당신들은 국가가 부르면 응답하지 않겠는가?'라고 묻고 있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아이히만을 보고, ‘아히히만은 근면한 인간이었다. 그가 악인임을 입증할 만한 것들이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와 예루살렘 법정은  ‘그는 악한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그의 악’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죄라구요? 이 죄의 규정대로라면, 그런 죄를 짓지 않은 인간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요?
히틀러를 뽑았던 독일 국민들, 이명박, 박근혜를 뽑은 한국 국민들은요?
반대로 노무현과 문재인을 뽑은 한국 국민은 충분히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환경에 대해서, 핵에 대해서, 국제평화에 대해서, 제 3세계의 천문학적 국가 부채에 대해서
여러분은 충분히 생각하고 계십니까? 책임있는 행동을 하고 계십니까?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을 잘 아시죠.
75%의 실험 참가자는 살인에 동조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멀쩡한 시민이 특정 조건하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살인에 가담하는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이 뭘 말해주나요? 
내 행위가 있기도 전에, 나의 의식적인 판단이 있기 전에 이미 나는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미 우리는 악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3) 사실 원죄는 이미 우리가 어느 정도 다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굳이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 거대한 인간 역사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죄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자기 집 문은 잠급니다. 왜요? ‘누군가’ 훔쳐갈 줄을 아니까요.
여기서 '누군가'는 잠정적으로 모든 인간이라고 전제합니다.
심야에 길을 걷는 사람에게, 귀신이 무서울까요, 사람이 무서울까?
우리는 인간이 선량하기 보다는 악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인간 심성이 왜곡되고, 기만적이라는 말 아닙니까?
순자는 말하기를, 인간은 본성상 악하여, 날 때부터 이익을 구하고, 질투하고,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늘 인간 세상은 싸움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토마스 홉즈도 인간은 언제나 타인에 대해서 늑대(Homo homini lupus)라고 했구요,
샤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인간관은 원죄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악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을 소설 <파리대왕>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설은 보이스카웃 대원들이 섬에 조난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요, 여기서 ‘소년들’이 상징하는 것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섬에서 한 일은 자치 정부를 만들고, 독재자를 옹립하고, 거짓 종교를 만들고, 친구 학살를 학살한 것이었습니다.
이 소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인간은 본성상 악하다!'
정신분석학자는 갓 태어난 영아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며, 심지어 자신이 신이라는 환상을 가진다고 합니다.
인간 본성의 폭력과 이기심은 영아 때부터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전능환상이라고도 부르는데요, 물론 이러한 전능 환상을 무조건 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삶의 에너지의 근원도 여기서 나오니까요.
다면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유아가 타블라 랏사, 곧 백지 상태로 태어난다는 계몽주의자들의 인간관은 허상임이 분명하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에 대한 그 어떠한 환상이나, 허상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에 대한 지독한 현실주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원죄사상입니다.

3. 이러한 원죄 사상이 이르는 결론은 무엇일까요?
당연하게도 절망일 것입니다.
기독교 원죄 사상이 초래하는 결과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절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은 죄성으로 가득차 있으며, 따라서 인간에 대해서는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주장하지만, 그것은 거짓입니다.
[롬1:22]“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스스로 ‘나는 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자가 아니라,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를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벧전5:5]

우리는 구약의 전쟁 이야기와 신화 속의 전쟁 이야기가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신화 속 전쟁 이야기를 보면, 신들은 위대한 전쟁 영웅을 참 좋아한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정반대입니다. '너는 가만히 있어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이다.' 이것이 구약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기드온과 300용사 이야기와 테르모필레 전투의 300명의 스파르타 군사 이야기를 비교해볼까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300' 이야기의 강조점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용기와 위대한 전쟁 능력이지요.
하지만 기드온과 300용사의 강조점은 정반대입니다. 기드온과 300명은 무력하며,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승리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3만명을 1만명으로, 다시 300명으로 줄인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전쟁에서 이겼다고 착각할까봐였습니다. 즉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점에서 기드온 이야기는 테르모필레 이야기와 반대입니다.

원죄 사상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죄로 인해 철저히 부패했으므로 스스로 의롭게 되거나 구원에 이를 가능성이 전무한 것입니다. 따라서 원죄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며, 하나님께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게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3]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자신의 죄성과 악마성에 절망하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알콜 중독 얘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알콜 중독은 불치병이라고 하지요. 왜 알콜 중독이 고치기 어려울까요? 그것은 자신이 알콜 중독 환자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Q: ‘이 보시오. 당신은 알콜 중독자요. 알콜 중독은 병이오.’
A: ‘나는 중독자가 아니라 단지 애주가일 뿐...’
Q: ‘당신 손을 보시오. 떨고 있지 않소. 얼굴이 노랗지 않소. 간이 안 좋다는 증거요.’
A: ‘이건 요즘 내가 좀 피곤해서 그런거요. 푹 쉬면 좋아질거요.’
Q: ‘당신은 이미 당신 능력으로 그것을 해결할 수 없게 되었소. 그러니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시오.’
A: ‘나는 술을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소. 지금이라도 당장 술을 끊을 수 있소.’

이 대화에서 볼 수 있듯이 알콜 중독자는 끊임없이 변명하고, 끊임없이 회피합니다. 자신의 문제와 직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치유의 첫 걸음은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실제로 알콜 중독 치유프로그램인 AA 12단계 중 1단계는 ‘나는 알콜 중독자이다. 나는 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정확히 우리 인간의 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죄에 대해서 인간과 하나님의 대화를 구성해 본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진행될 것입니다.
하나님: ‘얘들아, 너희는 죄인이란다.’
인간들: ‘뭔 소리여. 죄인이라니. 이 놀라운 현대문명을 보시오. 이 모든 게 우리가 한 거요.’
하나님: ‘전쟁, 테러, 원칙 없는 외교, 자본주의, 유아노동, 인신매매, 자원고갈, 환경오염, 핵폐기물.. 이 모든 끔찍한 결과들이 보이지 않니? 너희가 죄인이라는 증거가 아니냐.’
인간들: ‘그건 극소수의 사례일 뿐이에요. 과도한 일반화입니다. 인간 중에는 얼마든지 선량한 인간도 많아요.’
하나님: ‘얘들아, 너희는 이미 너희가 사는 세상을 회복시킬 능력이 없단다. 왜 그 사실을 인정치 않니.’
인간들: ‘무슨 말씀입니까? 아직 과학기술이 발전 중에 있어요. 지금보다 테크놀로지가 더 발전하면 지금의 문제들은 얼마든지 우리 손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변명하고,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문제는 고쳐지지 않고, 인간 사회의 문제도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문명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70억 인구의 대오각성이 필요할 것이지만,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거대한 차원에서만 이야기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변명과 회피로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문제 없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첫 걸음은 ‘저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틀렸습니다.’라고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간구해야지만 소망이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은총이 임합니다.

요약하면, 
원죄론은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인정한 후,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게 하는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문제 있다는 것을 머리가 아니라 나의 전 존재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굴복하고, 항복하도록 촉구하는 교리가 원죄 교리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끝끝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지요.
끝까지 도망하고, 부정하고, 회피하고, 변명합니다. 그러다가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면 갑자기 낯빛을 바꾸어서 이렇게 따집니다.
“하나님은 나를 왜 이렇게 만든거야. 왜 아담을 만들어서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든거야? 왜 날 이렇게 만들었어????”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전7:29]
새번역으로 읽으면 좀 더 읽을 맛이 납니다.

“그렇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 아이에게서 단순함과 진실함을 봅니다. 아이들은 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 합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복잡합니다. 어른이 되는 것은 복잡해 지는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변명, 회피, 합리화... 이런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죄를 점점 흐릿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복잡함으로 죄를 은폐하는 것이 현대 범죄의 특징 같습니다. MB의 자원외교, 삼성 바이오 분식 회계 사건, 억지를 부리는 자한당 논리... 이런 것들의 특징이 있죠. 너무도 명확한 사안을 오리무중이 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원죄 교리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정직해지라는 것이고, 투명해 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죄와 악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달려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원죄론은 혼내기 위한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나오면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다는 약속의 교리입니다.

원죄론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오라. 그러면 은총을 입을 것이다!"
"회개하라! 그러면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