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칼럼

영화 <뉴스 오브 더 월드> 리뷰: 이야기의 힘(the power of story)

Caleb Shin 2021. 2. 24. 13:50

 

인간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 같지만 실은 이야기가 인간을 만든다. 이야기는 세계이다. 어떤 이야기를 선택하느냐는 어떤 세계 속에 사느냐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심리적으로 병든 사람들은 대부분 비합리적 신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은데, 한 마디로 '좋지 않은 이야기' 속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치료란 그 비합리적 신념을 건강하고 합리적 신념으로 바꾸는 작업을 포함하는데, 바꿔 말하면 나쁜 이야기를 떠나서 '좋은 이야기'로 옮겨와야 한다는 뜻이다.

 

<뉴스 오브 더 월드>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이야기 치료 과정을 볼 수 있다. 팔리씨가 지배하는 작은 도시 이래스에서 사람들은 팔리씨가 만든 이야기 속에 살고 있다. 이래스에서는 들소 사냥, 노동력 착취, 인종 차별, 인디언 학살과 같은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는데, 시민들은 그러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팔리씨의 이야기 속에 속해 있었다는 뜻이다. 심지어 존 캘리는 팔리씨에 의해 가족인 토미가 죽임을 당했음에도 그의 이야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토미는 질문하고 소리쳤기 때문에 팔리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한 마디로 팔리씨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살해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꾼인 키드 대위는 하퍼스가 읽으라고 하는 <이래스 저널>의 이야기 대신 <하퍼스 일러스트레이티드>가 전하는 펜실베니아의 작은 마을인 킬런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 이야기는 그들이 들어왔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이야기는 남부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북부 사람들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야기를 전하던 중 팔리는 키드 대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읽으라고 한다. 이때 키드 대위는 투표를 제안한다.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듣기 원하는지 스스로 선택(!)하도록 투표하자고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킬런의 이야기를 선택한다.

 

킬런의 이야기는 저항의 이야기였다. 소도시 킬런은 팔리씨의 도시와 비슷하게 소수의 자본가들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탄광 도시였다. 탄광에 불이 나서 많은 광부들이 죽었다. 그런데 살아남은 11명의 생존자들은 자신들의 지배자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문명의 기둥들을 뿌리뽑았다. 킬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이래스 사람들은 팔리가 지은 이야기 속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다른 이야기 속에 속하기로 선택한다. 그리고 그들은 팔리씨의 지배에 항거한다. 존 캘리도 더 이상 팔리씨의 지배를 거부하고 토미의 복수를 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의 힘이다.

 

사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조해나가 말의 등잔을 쓸어주면서 인디언 말로 부른 노래 속에 들어 있다.

 

들소들이 전부 죽어가/

선택을 해야 해/

맞서든지, 영원히 쓰러지든지

 

영화의 배경은 남북 전쟁 직후 남부 텍사스였다. 북부는 전쟁에서 승리했고, 남부는 패배했다. 이는 북부의 이야기가 남부의 이야기를 눌렀다는 뜻이다. 북부의 이야기는 수정헌법 13, 14, 15조를 통해서 드러난 미합중국의 통일에 관한 이야기이고, 노예제 폐지에 관한 이야기, 전쟁 부채 상환에 관한 이야기다. 남부의 이야기는 남부 독립과 노예제 존치, 그리고 맥시칸, 흑인, 인디언들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이다. 승리한 북부의 이야기는 패배한 남부 사람들에게 충성 맹세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버리고 북부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많은 남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패배한 것에 큰 상처를 받았다. 키드 대위 역시 남부군 출신으로 패잔병이다. 그리고 드문드문 보이는 북부 군인과 치안관의 존재가 북부 이야기의 승리를 상기시키고 있으나 텍사스인들은 아직 자신들의 이야기를 놓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아직도 자신들의 이야기로 삶을 지속하려는 시도들이 난무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야기의 교체기에서 벌어지는 혼란 상황이 바로 영화 속의 배경이다.

 

이야기의 교체기에서 키드 대위가 뉴스를 전하는 뉴스맨으로 등장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혼재하고 있으며, 그래서 수많은 세계들이 뒤섞여 있다. 그러한 혼란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결정해야 한다.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세계를 만들 것인지를 말이다. 뉴스맨이 할 일은 사람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 청자들로 하여금 그 이야기 속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이다. 그래서 키드 대위는 말한다.

 

사람들에게 선택권을 준 것 뿐이에요.”

 

새로운 이야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단순히 동화책 전집 중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서 읽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킬런 사람들이나 이래스 사람들처럼 이야기 속에 들어가 산다는 뜻이며, 자신이 사는 세계를 새롭게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이야기를 떠나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문명의 기둥을 뽑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선택한다는 뜻은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뜻이다. 하여 그것은 혁명을 동반한다.

 

하지만 이러한 혁명은 무엇보다 먼저 내면에서 시작된다. 곧 정체성의 변화로부터 시작한다. 영화 속의 조해나에게는 세 개의 이름, 곧 세 개의 정체성이 있다. 첫 번째로 그녀는 조해나 리언버거이다. 그녀는 독일 이민자 가족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아마도 그녀의 가족은 백부와 백모가 속한 것과 같은 이야기, 곧 어메리컨 드림이라는 이야기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이민자로서 낯선 땅에서 끊임없이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끔찍한 비극으로 인해 다른 이야기로 대체되고 말았다. 다른 이야기는 인디언들이 만들어준 이야기다. 그녀의 가족은 인디언에 의해 죽임당했으며, 그녀는 인디언에 의해 길러지게 되었다. 그녀는 돌아가는 물세 개의 점이라는 이름의 새 부모 밑에서 시케이다라는 이름의 인디언으로 길러지게 되었다. 조해나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디언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사납고, 미국인의 옷을 거부하며, 마치 저주에 걸린 듯 행동한다. 그리고 키드 대위가 알려주는 조해나라는 자신의 독일 이름도 거부한다.

 

하지만 북군에 의해 카이오와족은 쫓겨나고 그녀는 키드 대위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가 그녀에게 다가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새 이야기는 그녀에게 새 정체성을 준다. 그것은 바로 조해나 키드라는 이름이다. 결국 그녀는 키드 대위의 딸로 입양된다. 조해나라는 이름을 거부했던 그녀이지만 조해나 키드라는 이름은 받아들인다. 첫 번째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 그리고 첫 번째 정체성과 두 번째 정체성은 모두 그녀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주어졌다. 그러나 세 번째 이야기와 정체성은 유일하게 그녀가 선택한 이야기이고,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인 정체성이다.

 

이야기는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목적지도 결정한다. 영화 속에서 목적지는 종종 ’(home)으로 불린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독일 이민자의 딸 조해나의 목적지는 캐스트로빌이다. 그곳에는 독일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만일 조해나가 여전히 독일 이민자의 딸이 맞다면 그녀가 돌아갈 곳은 캐스트로빌이다. 키드 대위가 목숨을 걸고 조해나를 캐스트로빌의 백부의 집으로 데려다 주고자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조해나는 이곳을 자신의 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조해나는 독일 이민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디언 부족 카이오와족의 이야기 속에 속해 있기 때문에 자신을 인디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녀는 카이오와족이 사는 곳을 자신의 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집에 데려다 달라고 말하는 것이나, 레드리버 타운에서 한밤중에 탈출해서 강 건너편 인디언 부족과 합류하고자 소리 지른 것은 그 때문이다.

 

세 번째 이야기 속에서 조해나는 조해나 키드가 된다. 이제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목적지는 바뀐다. 집은 키드 대위와 함께 하는 것이다. 집은 장소가 아니다. 키드 대위가 그녀의 집이다. 마지막 씬에서 그녀는 키드 대위의 뉴스 전하는 일을 돕는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웃음을 보인다. 집에 돌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야기는 정체성과 함께 목적지를 결정한다.

 

흥미롭게도 이 모든 것은 정확히 키드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키드 대위는 다른 텍사스 사람들과 같은 이야기 속에 속해 있었다. 아마도 그는 남부 독립을 위해서 싸웠을 것이고, 노예제 존치를 위해서 전투했을 것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그의 집은 샌안토니오였다. 샌안토니오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여 대위는 속히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아내는 콜레라로 죽고 만다. 아내의 죽음은 키드 대위에게 새로운 이야기에 속하도록 만들었다. 자신이 하는 그 모든 일, 곧 자신이 보고, 자신이 했던 그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심판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심리적으로 병든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비합리적 신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키드 대위는 나쁜 이야기 속에 갇히고 말았다. 친구는 키드 대위의 이야기가 비합리적이라고 설득한다. 키드 대위의 부인은 그냥 콜레라로 죽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키드 대위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야기는 쉽게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 속에서 키드 대위는 갈 곳을 잃었다. 샌안토니오는 더 이상 키드 대위의 집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가기를 피하고 있다. 나쁜 이야기 속에서 키드 대위는 '집'(home)을 잃었다. 곧 삶의 목적지와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애써 다른 곳을 향한다. 그는 유리 방황하고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이 도시 저 도시를 전전하며 뉴스를 읽어주고 남쪽으로 내려가고 싶어한다. 그리고 뉴스에 나온 지역들을 돌아 다녀보고 싶어한다. 아마도 키드 대위는 아벨을 죽여서 신의 심판을 받은 가인이 놋땅을 유리 방황하듯이 그렇게 저주 받은 삶을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쁜 이야기 속에서 말이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조해나가 나타났다. 조해나의 집은 캐스트로빌이다. 그리고 캐스트로빌 바로 옆은 샌안토니오다. 키드 대위가 한사코 조해나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하는 것은 샌안토니오를 피하고 싶어서다. 그러나 결국 키드 대위는 일주일도 넘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 캐스트로빌로 조해나를 데려다 주고, 동시에 자신을 샌안토니오, 곧 집으로 데려다 준다. 그리고 그는 버려진 자신의 집에 들르고, 아내의 묘지를 찾는다. 드디어 그는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숙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내의 무덤에서 키드 대위는 이상한 행동을 한다. 결혼 반지를 빼서 아내의 무덤에 두는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것은 그가 전한 마지막 이야기에서 그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 알프레드처럼 죽어 있었다. 의식을 잃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그리고 마치 무덤 속에 묻힌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저주 받은 인간이었으니까...

 

그런데 아내의 무덤을 찾은 순간 그는 그곳에서 생명의 약동을 느낄 수 있었다. , , ... 필사적이고, 틀림없는 생명의 쾅쾅거림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키드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제 그는 옛 이야기를 버리고, 새 이야기에 속하기로 선택해야 했다. 결혼 반지를 빼는 것은 옛 이야기를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아내를 마음 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별하지 못함이 신의 심판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내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신의 심판을 받은 존재라는 비합리적 신념도 벗어버릴 수 있었다.

 

무엇이 그의 가슴을 그렇게 두드렸을까? 아마도 그것은 조해나를 향한 연민과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해나의 얼굴이 살았으나 죽은 자와 방불했던 키드 대위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던 것이다. 쿵 쿵 쿵!!! 그 필사적이고, 틀림없는 생명의 쾅쾅거림을 들은 키드 대위는 죽은 아내와 이별하고 그는 이제 새로운 가족을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곧 과거의 나쁜 이야기와 이별하고 새롭고 좋은 이야기(good news) 속으로 들어가기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신의 심판을 받은 존재가 아니다. 도리어 그가 가족을 이루고자 그토록 마음 속으로 소망했던 소원이 성취되었다. 그러니 그는 이제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다.

 

새 이야기는 삶의 이야기고 부활의 이야기다. 그 동안 키드 대위는 죽음의 소식을 많이 전했다. 유행성 수막염으로 97명이 사망했던 이야기, 광산 화재로 19명의 광부가 죽어간 이야기, 레드리버 연락선의 침몰 소식 등등.. 하지만 마지막으로 전한 키드 대위의 이야기는 한 남자가 죽음에서 살아난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새 이야기는 복음, 즉 굿 뉴스(good news)이며, 희망에 관한 이야기이며, 부활의 이야기다.

 

새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에 속한,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함께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기로 결단했다는 점에서다. 그리고 이것은 파편화된 조각난 이야기들이 서로 충돌하고 갈등하는 상황에 대한 참된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멕시코 장벽과 인종 간 갈등, 남부와 북부의 여전한 정치적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트럼프 시대와 작별하고 서로가 조화를 이루며 더 큰 이야기를 만들어 가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것은 광화문에 속한 이야기와 서초동에 속한 이야기가 하나로 통합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영화일 수도 있으리라.